청산리 전투

청산리 대첩 기록화
출처: 독립기념관

‘청산리전투’와 홍범도장군

오 세 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전 연구원)

〈〉 2020년 소식지 가을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1. 왜곡된 기억, 과거 한국사회에서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 

 

“홍범도와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國民會)와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의군부(義軍府) 등은 8일 밤 도착해 작전회의를 열었다. 김좌진을 총지휘, 홍범도, 최명록 두 분을 부사령으로, 여행 단장이었던 내가 전적 총지휘, 즉 전투사령관으로 부서를 정했다. 그런데 9일 밤 새벽에 보니 아무 연락도 없이 모두들 떠나가 버렸고, 다만 한민단 1개 중대만 남아 있었다. 3개 단체는 아무말 남기지도 않고 밤의 장막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의 일원으로 ‘청산리전투’에 주역으로 참여한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 1900~1972)은 자신의 회고록인 「우둥불」에서 ‘청산리전투’ 직전의 상황을 위와 같이 회상했다. 그는 홍범도 부대가 작전회의 다음날 말도 없이 떠난 이유에 대해 “부서와 임무 배당에 불만” 때문이라는 사실과 함께 “5만이 넘는 적의 대병력의 기세에 압도당해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천수평(泉水坪)에서 일본군과의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홍범도 부대가 협공하지 않은 사실과 안도현(安圖縣) 입구인 우도양 창 계곡에서 부주의한 처사로 인해 일본군의 포위망에 걸려 수십 명의 부대원을 잃게 되었다고 홍범도를 비판했다. 그리고 이범석은 “홍범도 장군이 청산리 싸움에 참여하려다 그만두고 단독으로 행동하다가 타격을 받았다”고 다시 한번 홍범도의 실책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주역이자 중국 동북항일군,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에 참여하며 한평생을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해 온 이범석의 회상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와 학계에서 ‘청산리전투’에서의 역할, 나아가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경향은 해방 직후인 1947년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 1965년 김승학의 「한국독립사」, 1973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나타났다. 심지어 1989년에는 북간도에서 병사한 홍범도 장군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는 연변측 인사들의 주장이 한 일간지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소련의 고려인 동포들은 홍범도 장군의 자필 이력서와 자서전, 그리고 묘소 사진을 공개하며 이를 반박했다. 이러한 상황은 소련에서 말년을 보낸 홍범도 장군의 특성상 분단과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자료 접근에 대한 한계에 기인한 바가 컸다. 그리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일부 인사들의 증언과 주장을 객관적인 비판 없이 수용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한국 학계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면서 ‘청산리전투’에서의 역할과 항일무장투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전투’ 이전 독립군 부대 통합 노력과 ‘청산리전투’ 당시 대한군정서와 연합하여 일제로부터 승리한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독립군의 연합결렬과 홍범도 장군의 부단한 노력 

 

‘1920년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평가받는 ‘봉오동전투’ 당시 홍범도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대한국민회와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북간도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기 위해 안정근(安定根)과 왕삼덕(王三德)을 파견하여 통합대회를 개최하고 부대 통합을 논의했다. 그 결과 ‘민단(民團)과 군단(軍團)의 이원화된 통합군단’을 결성하는 방안에 따라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은 동도군정서(東道軍政署)와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의 군무기관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통합은 ‘일시적’인 통합에 그치고 말았다. 대한군정서 내부에서는 대한국민회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된 이 통합안에 반대 의견이 터져 나왔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봉오동전투 당시 ‘삼단연합’의 한 축을 담당했던 최진동의 반대였다. 최진동은 민단의 업무는 대한국민회가 담당하고 군단의 업무는 군무도독부가 담당하는 ‘통합군단’을 결성하기로 대한국민회와 합의하고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했다. 그러나 1920년 7~8월 동안 3차례에 걸친 연합회의 결과는 최진동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한국민회는 이원화된 통합군단의 민단으로 그 역할과 대표성을 유지하고 있던 반면, ‘통합군단’의 군무기관이었던 대한북로독군부는 동도독군부 산하로 편제되면서 상징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최진동은 대한국민회측 인물이었던 대한북로독군부 제3대장 강승범(姜承範)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이었던 김호석(金豪碩)을 임명했다. 그러자 대한북로독군부 제3대에 소속되어 있던 국민회 출신 병사 100여 명이 무기를 들고 홍범도 부대로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최진동이 대원들을 파견해 국민회 동부지부장 양도헌(梁道憲)을 체포하자, 군무도독부와 대한국민회가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한국민회는 즉시 홍범도에게 최진동을 공격할 것을 명했지만, 홍범도는 이에 응하지 않고 부대를 이끌고 화룡현(和龍縣)으로 이동했다.

홍범도가 지금까지 지원을 받아왔던 대한국민회 측의 군무도독부에 대한 공격 명령을 거절하고 화룡현으로 이동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독립군들의 연합을 추구해왔던 홍범도의 성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홍범도는 일본군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같은 독립군들 간의 충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에 화룡현 방면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연합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는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방면으로 이동해 국내 진공 작전을 도모하는 한편, 10월 일제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간도지역을 침공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홍범도는 10월 13일 화룡현으로 이동해 온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과 한민회군(韓民會軍), 대한국민회군(大韓國民會軍) 등의 독립군 대표들과 회의를 개최하고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홍범도는 화룡현 삼도구(三道溝)에 집결한 대한군정서 측과도 연합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논의하고자 했다. 하지만 홍범도 연합부대와 대한군정서군은 일제의 공격으로 연합에 이르지 못하고 각자 일본군과 ‘청산리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이렇듯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삼단연합’이 붕괴되는 등 북간도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군단’을 둘러싼 갈등 상황 속에서도 홍범도는 독립군들의 연합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청산리전투’를 준비해 나갔다.

3. 연합작전의 승리, 어랑촌전투 

 

10월 21일 독립군을 추격해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 들어온 일본군과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서의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를 시작으로 ‘청산리전투’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부대도 이도구 어랑촌 서북방에 위치한 북완루구와 남완루구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일본군의 아즈마지대(東支隊)와 격전을 벌인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를 치르게 되었다. 홍범도는 후일 자신의 「일지」에서 당시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홍범도 부대가 완루구의 한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일본군은 주력부대를 출동시켜 토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예측한 홍범도는 밤 사이 병사들을 집결해 산 높은 곳에 매복시키고, 포위망 안으로 들어온 일본군에 집중공격을 가해 승리를 이끌어냈다. 일본군은 후일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에서 완루구전투에 대해 ‘밀림 중에 길을 잃어 남양촌에 이르러 숙영했다’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완루구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가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철저한 작전 수립을 통해 일본군으로부터 이끌어 낸 승리였다.

한편 백운평전투를 치르고 이도구 갑산촌에 도착한 대한군정서군은 천수평 마을에 일본군 1개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이범석이 지휘하는 연성대를 선두로 돌격전을 감행하여, 일본군의 주력이 어랑촌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은 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고지를 점령하고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한군정서와 일본군과의 전투는 점차 소모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대한군정서군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사격을 계속해야만 했지만, 군마 등이 많은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탄약 등을 추가로 보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대한군정서군을 포위하고 포병 공격을 가하는 한편, 대한군정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완루구전투를 치르고 안도현 방면으로 철수하고 있던 홍범도 연합부대는 어랑촌에서 대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방향을 바꿔 어랑촌으로 향했다. 홍범도 연합부대는 대한군정서가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있는 표고 874고지 인근의 883고지를 점령하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홍범도 연합부대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일본군의 측후방을 위협하고, 포병 공격을 비롯한 공세를 늦춰 대한군정서군을 지원했다. 당시 대한군정서군은 홍범도 연합부대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홍범도 연합부대의 지원으로 일본군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한군정서군은 전투력을 온전히 보전한 상태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어랑촌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홍범도 연합부대의 지원으로 무사히 철수한 대한군정서군은 이후 맹개골전투와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등을 통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청산리전투’에서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청산리전투’ 당시 가장 대규모 전투였던 어랑촌전투는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 핵심인 ‘연합정신’이 빛을 발한 전투였다.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의 포위 토벌 상황 속에서 ‘적강아약(敵强我弱)’의 형세하에서 공세적인 정서를 극복하고 은인자중하며 분산・은폐의 방법으로 전투를 피하면서 반일 역량의 보존에 힘쓸 것’을 가장 중점으로 두며 ‘반일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적들의 토벌권에서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그러나 홍범도는 위기에 빠진 대한군정서군을 지원하기 위해 어랑촌으로 향했고, 연합작전을 통해 어랑촌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이러한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부대의 통합 노력과 연합작전의 승리였던 어랑촌전투에서의 보여준 독립정신은 ‘1920년 독립전쟁’의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