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이야기

연표

탄생과 청년기 1868 – 1895

 

1868년 8월 27일
– 평양출생 부친 홍윤식 본관 남양
– 모친은 출생 7일 만에 사망

 

1876년(8세)
– 부친 사망 이후 머슴살이로 생계유지 1883년(15세)~1887년(19세)
– 병정모집에 자원하여 나팔수로 병정생활

1887년(19세)~1890년(22세)
– 군대의 부당함에 항거한 후 탈영하여 황해도 수안에서 종이 만드는 노동자로 일함
– 임금체불과 폭력 등이 일상이던 종이 공장, 주인 삼형제를 때려눕힌 후 도피

 

1890년(22세)~1892년(24세)
– 금강산 신계사에서 지담스님의 상좌로 삭발승이 됨. 이곳에서 애국정신과 항일의식을 키움

 

1892년(24세)

– 여승당에 머물고 있던 ‘단양 이씨’를 만나 사랑에 빠진 후 함께 금강산을 떠남.
– 만삭이었던 단양 이씨와 함경도로 향하던 도중 건달패를 만나 헤어짐

 

1893년(25세) – 1895년(27세)
– 먹패장골에서 사격연습을 하며 은둔생활을 하다 일본인들이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사건(10월 8일)에 분노하여 1895년 10월 11일 운둔생활을 청산하고 산간을 떠남.

의병투쟁 1895 – 1908

 

1895(27세)~1897(29세)
– 명성황후 시해사건 보름 후 10월 24일경 단발령고개에서 황해도 서흥 출신의 김수협과 의기투합하여 의병대 조직 결의(제1차 거의)
– 세 차례의 전투를 치렀으나 훈련부족 등으로 대패하여 의병진이 흩어지고 결의동지 김수협이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함

 

1898년(30세~1900(32세)
– 평남 양덕, 성천, 영원의 산간지방에서 단독으로 의병활동 전개

 

1900(32세)~1904년(36세)
– 의병운동이 쇠퇴하면서 의병들이 은둔하던 상황에서 북청군 안산에 정착 하여 농사 지으며 포수생활
– 러일전쟁 발발 후인 1904년 중반 무렵 일본인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6개월 만에 탈옥하여 1904년 말에 재차 항일의병봉기에 나섬(제2차 거의)

 

1907년(39세)
– 9월 친일적 한국정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반포로 사냥꾼들의 총기를 강압적으로 압수하기 시작함
– 10월 14일 봉기를 결심하고 북청치양동의 일진회 사무소 습격, 다음날 후치령 허리원에서 일본군 3명을 처단하고 총 자루와 총탄 300개 확보, 서짝골 포수막에서 14명의 포수를 만나 결의(제3차 거의)

무장독립투쟁 1908 – 1919

 

1908년(40세)
– 300여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갑산읍 점령, 이후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이 붙음
– 일본군의 귀순공작으로 차도선 부대 등 귀순의병이 속출함
– 일진회 간부들이 부인 단양 이씨와 아들 양순을 구금하고 회유책을 구사하고 거짓 편지 공작으로 홍범도를 유인하려다 실패
– 부인에게 발가락사이에 심지를 끼우고 불을 붙이는 고문 등의 악행과 자백을 강요 단양 이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혀를 끊어 벙어리가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함
– 아들 홍양순은 유인 편지를 갖고 홍범도 진영에 찾아왔으나 부친의 질타를 받고 부대에 합류, 바매기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
– 6월부터 7월 말에 걸체 일본군의 대공세로 의병부대들 대부분이 해산
– 10월 초 일본군과 접전, 밤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

 

1909년(41세)
– 의병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감
– 동포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에 종사

 

1910년(42세)
– 일본의 강제병합을 저지하기 위해 창설한 13도의군의 참모부 의원으로 선출됨
– 일본의 강제적 한국병합 직후인 9월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러시아 당국의 체포령을 피해 수청지방으로 도피하여 잠복함

 

1911년(43세)
– 항일운동단체 권업회 부회장으로 선임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청년회 조직,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국내에 회원을 파견하여 국내 상황을 정찰
– 부두의 노동판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한편 한인노동자들로 조직된 노동회를 결성 회장으로서 회원들의 임금을 모아 후일의 거사자금을 비축함

 

1912년(44세)
– 결의 동맹 ‘21형제’ 에 참여, 블라디보스토크 노인회 회원.
– 북간도 삼마동 부근에서 한인 100여명의 군사훈련을 지휘함

 

1913년(45세)
– 아무르강 어장에서 1년간 노동하여 번 금(金)을 자본으로 신문잡지(대한인정교보)를 발행하고자 운동함.

 

1914년(46세)
–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과 동맹국이 된 러시아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됨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라는 국제적 상황에 대응하여 향후의 무장투쟁을 준비함
– 당어재골에 은닉하고 후일을 기약함

 

1915년(47세)
– 9월 5일 의병들을 이끌고 북만주의 ‘밀산’지역으로 들어감

 

1915년(47세)~1918년(50세)
– ‘남백포우자’와 ‘한흥동’에 고등소학교, ‘십리와’와 ‘쾌상별이’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한흥동학교 교장, 교감, ‘십리와’와 ‘쾌상별이’ 소학교의 후원회장으로 활약함
– 밀산을 방문한 이동휘와 회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1919 – 1920

 

1919년(51세)
– 대한독립군 창설 총사령관으로 취임
– 국내외의 3.1운동에 호응하여 ‘밀산’지역의 한인들도 만세운동을 전개함, 무장투쟁에 나서기로 하고 밀산을 떠나 의병을 모집, 항일 무장 투쟁을 준비
–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이 조직한 ‘군정부(독립군부)’에서 ‘독립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북간도로 진출하여 독립군을 지휘하라는 통지서를 보냄
– 12월 노령주둔 ‘대한독립군(의용)대장’의 명의로 박경철, 이병채와 함께 「유고문」반포, 항일무장투쟁독립론과 상해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에 호응하여 독립전쟁을 개시할 것임을 선언.

 

1920년(52세)

<봉오동대첩>
–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 대한국민회 군무위원회 간의 ‘삼단연합’ 성립 – 6월 4일 북로독군부의 1개소대가 두만강 대한 국내 일본군 초소격파
– 6월 6일 삼둔자에서 북로독군부 최진동부대가 일본군 월강 추격대 섬멸
– 6월 7일 홍범도, 최진동, 안무가 지휘하는 북로독군부와 신민단 부대가 연합하여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대패시켜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를 거둠
– 8월 7일 삼단연합 붕괴 결과로 북로독군부 군대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 대한국민군으로 분열됨

 

<청산리대첩>
– 10월 21일~26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신민단군대, 한민회군대 등과 연합부대를 이루어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내어 대승을 거둠
– 11월 중순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교성대, 광복단 군대와 연합하여 ‘대한의용군’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선임됨

무장독립투쟁의 전환기 1920 – 1937

 

1921년(53세)
– 1월 초 밀산과 호림의 경계지대인 십리와에서 북로군정서군대와 통합을 위한 1차 회의 개최
– 연합에 합의 하고 제2차 삼단연합 달성
– 2월 중순경 연해주의 이만으로 이동
– 3월 5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에 교섭하여 독립군의 제2군단에 무기를 넘기고 자유시(스바보드니)로 이동
<자유시참변>
– 6월 28일 자유시에서 벌어진 대한독립군 무장해제 및 통합 부대 지휘권을 둘러싼 한국 무장독립투쟁 사상 최대의 비극

 

1922년(54세)
– 모스크바 코민테른 주최의 극동제민족대회에 한인대표로 참석, 레닌을 만나고 권총과 금화를 받음

 

1923년(55세)
– 사할린의용대 출신의 김창수와 김오남에게 피습당하여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으나 레닌으로 받은 싸총으로 두사람을 사살,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됨

 

1924년(56세)~1926년(58세)
– 이만 ‘싸인발’의 한인농촌에서 3년간 농사에 종사

 

1927년(59세)
– 소련공산당에 입당

 

1928년(60세)~1933년(65세)
– 원동 각지의 도시와 농촌의 고려인구락부, 군부대, 피오네르(소년단)에 초청되어 애국주의와 국제주의적 정신교양을 고취함

 

1929년(61세)
– 러시아에서 이인복여사와 재혼

 

1934년(66세)~1937(69세)
– ‘레닌의 길 꼴호즈’의 수직원(수위)로 일함

강제이주와 쓸쓸한 말년 1937 – 1943

 

1937년(69세)
– 스탈린 강제 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사나리크로 강제 이주당함.

 

1938년(70세)
– 5월 경 고려극장 극작가 태장춘이 홍범도를 주인공으로 한 희곡작품 집필을 위하여 집으로 초대하여 담화함
–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의 수위로 근무
– 7월 말 이후 자서전 「홍범도 일지」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

 

1941년(73세)
– <레닌의 긔치> 신문 1941년 11월 7일자에 「원쑤를 갚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청년들에게
‘조국 소련’을 위해 전선에 나설 것을 촉구함.

 

1943년(75세)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서거

서거 이후 1962 – 2023

 

1962년
–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2018년
–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전쟁 영웅으로 교정에 흉상 건립 및 명예졸업장 수여

 

2021년
– 3월, 부인 단양 이씨, 1남 홍양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
– 8월 15일, 유해 고국으로 봉환
–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2022년
– 8월, 무(無) 호적 독립유공자에게 가족관계등록부 창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