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아카데미

홍범도장군 흉상철거 주장의 왜곡과 오류

임성욱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특임강의교수)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2023년 12월 15일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최근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흉상 철거 이전을 결정하고 전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방부 및 극우 인사, 극우 언론들은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주장과 논리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그들의 주장과 논리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하나하나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를 검토한 결과, 그들의 주장과 논리에는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고 있거나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료 분석 및 해석의 오류, 근거 없는 추론과 상상에 따른 논리적 비약, 자신들의 신념에 역사를 끼워 맞추는 식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왜곡과 오류의 수준이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과 논리에 담긴 왜곡과 오류가 무엇인지를, ‘그들의 주장을 접한 시민들이 궁금해할 법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Q&A 형식을 통해 하나하나 밝혀보겠습니다.

Q1 : 홍범도 장군은 공산주의자 아닌가요?

“육군사관학교는 (중략) 북한을 대상으로 해서 전쟁을 억지하고 전시에 이기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하는 곳인데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제기되어서.”

– 2023년 8월 25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종섭 당시 국방부장관의 발언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 사관생도 교육을 고려할 때 소련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 논란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 더욱이 사관생도 교육의 상징적 건물인 충무관 중앙현관에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이 있어 왔음. (중략)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등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

– 2023년 8월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문

 

 

A1 :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이 사상적으로 투철한 공산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합니다.

(1) 홍범도 장군은 1927년 59세의 나이에 뒤늦게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과 가족과 독립군 부하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함이었습니다.

(2) 홍범도 장군은 소련공산당 가입 전후에 집단농장을 운영하였으며, 1937년에는 다른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강제이주를 겪으며 고생을 한 점에서 알 수 있듯, 소련으로부터 인정받는 공산주의자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3) 홍범도 장군은 스스로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했다고 볼 만한 언행을 전혀 한 적이 없으며, 일생을 통해 그가 보여준 정체성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시기가 1927년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의 나이는 59세였는데, 1929년부터는 노후 연금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1923년부터는 집단농장을 꾸려서 현실적으로 러시아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독립군 부하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당국으로부터 황무지를 불하받아 농로를 만들고 농기구 등을 제공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이 무렵 홍범도 장군은 재혼하여 부인과 부인이 데려온 딸이 있어서 가족이 늘어난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공적인 여건상 공산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홍범도 장군이 사상적으로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다면 그리고 공산당에 가입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굳이 뒤늦게 1927년이 아니라 나이도 더 젊고 활동도 더 많이 할 수 있었던 자유시참변 전후의 1921년 혹은 레닌을 만났던 1922년경에 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홍범도 장군은 당내 영향력도 키울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일찍 공산당에 가입할 기회가 얼마든지 많았음에도 홍범도 장군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굳이 말하자면 홍범도 장군은 생계형당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홍범도 장군은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이후에 어떠한 직책을 맡은 적도 없으며, 특히 은퇴한 후에는 평당원이자 은퇴한 명예 군인으로서 집단농장 수직원(수위장) 생활을 하며 살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1937년에는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아랄해 근처의 카잘린스크라는 시골 벽촌으로 강제이주 당해야 했습니다. 만약 홍범도 장군이 소련으로부터 인정받는 공산주의자였다면 이러한 조치를 당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셋째, 홍범도 장군은 일생에 걸쳐 공산주의를 신봉했다고 보여질 만한 언행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홍범도 장군은 1922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할 때 작성한 조사표의 [직업] 항목에 ‘의병’, [목적과 희망] 항목에 ‘고려 독립’이라고만 적었을 뿐입니다. 이는 많은 참가자들이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한다’ 또는 ‘공산주의를 희망한다’고 답변했던 것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조사표의 [소속 정당 및 단체] 항목과 [소속 노동조합] 항목에 모두 ‘없다’고 답했습니다. 즉 홍범도 장군은 당시 러시아령에서 활동했음에도, 또 자유시참변을 겪은 직후였음에도 어떠한 공산주의 정당이나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말년에 『홍범도 일지』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일생에 대한 회고록을 남겼습니다. 이 회고록은 자신이 살아온 일생의 순간순간을 가감 없이 매우 솔직담백하게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홍범도 장군은 자신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서도 전혀 말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홍범도 일지』는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일생을 걸쳐 관통하고 있는 정체성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Q2 : 그렇지만 홍범도 장군이 진정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기록이 있다는데요?

“주의할지어다. 우리의 수적(讎賊, 원수인 적)은 다못 일본 침략주의자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잇나니라. 자서히 말하면 관료 급(及, 및) 유산자이며 홍(紅)〇와 같은 외홍내백(外紅內白, 겉은 빨갛고 속은 하얗다)한 가면 공산당원들이로다.”

– 1921년 9월 15일,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코민테른 고려부) 및

각 의병대 수령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허근), 안무, 이청천(지청천) 명의로 작성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의게[에게]」 중에서

 

“홍범도 동무는 레닌-쓰탈린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 년치가 이미 높앗음에 불구하고 사회사업에 열성있게 참가하시엇으며 당의 사명을 꾸준히 실행하기에 정력을 앗기시지 않앗다. 우리 조국에와 볼셰위크당에 퍽 충직한 홍범도 동무는 자긔의 생의 경로를 진실히 마추고 길이 돌아가시엇다.”

– 1943년 10월 27일자, 카자흐스탄 고려인 신문 『레닌의 긔치』에 실린

홍범도 장군 부고 기사 「홍범도 동무를 곡하노라」 중에서

 

A2 : 그렇지 않습니다.

(1) 첫 번째 문건은 이르쿠츠크파가 홍범도 등 독립군 부대장들의 명의를 도용하여 작성한 문서로서, 홍범도 장군의 의사나 입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문서입니다.

(2) 두 번째 문건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지역 공산주의 기관지에 실린 부고 기사의 일부로서, 해당 부분은 소속 고려인 직원들이 홍범도 장군을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로 ‘미화’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이며, 소련공산당 상부의 공식적 평가가 아니어서 신뢰성이 떨어지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선 첫 번째 문건은 자유시참변 이후 한인 사회 내에서 가해자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피해자인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에 책임론이 불거지자 수세에 몰린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를 공박하고 자신들의 무력 진압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1921년 9월 15일에 작성한 성명서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외홍내백한 가면 공산당원들’이란 바로 상해파를 의미합니다. (자유시참변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 참조) 극우 언론과 여당 의원들은 이 문건의 내용 중 ‘유산자는 말할 것도 없고 철저하지 못한 공산당원마저도 적대시’하는 부분을 근거로 홍범도는 무늬만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 이념에 경도된, 뼛속까지 빨간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이르쿠츠크파가 홍범도, 최진동, 안무, 이청천(지청천), 허재욱(허근) 등 간도 독립군 부대장들의 명의를 도용해 만든 문서입니다. 1922년 2월 원동혁명단체대표회(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한 홍범도, 최진동, 김동한은 공동 명의로 「조선 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에는 ‘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에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고 최후통첩을 하는 등 협박했지만 자신들은 끝까지 이를 거부했으며, 그러자 그들은 동의 없이 임의로 자신들의 이름을 넣었다.’라고 폭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문건은 홍범도 장군의 의사나 입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문서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문건은 홍범도 장군 사후에 크즐오르다 지역 신문에 실린 부고 기사입니다. 극우 언론과 여당 의원들은 이 기사 중 ‘홍범도가 소련공산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 당의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표현을 근거로 홍범도는 레닌뿐만 아니라 스탈린에게도 충성을 다 바친, 볼셰비즘에 경도된 충직한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레닌의 긔치』라는 신문이 비록 순한글로 된 고려인 신문이기는 하지만 발행 주체가 ‘카자흐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크즐오르다주 조직국 및 시르다리아 구역위원회’로서 공산당 기관지였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 이주 등 고려인들의 삶의 어려움과 불만 등을 자유롭게 제기할 수 있는, 즉 표현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는 신문이 아니라 공산당의 엄격한 통제하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선전을 목적으로 발행되는 신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또한 부고 기사의 작성자가 강알렉쎄이, 김블라지미르, 서재욱, 남해룡, 김학권, 김긔순으로 나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신문사의 주필 등 직원이었으며 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사람들이었으므로 이들이 홍범도 장군에 대한 평가를 당과 연결시켜 서술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로 보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고려인 사회의 존경받는 항일무장투쟁 지도자의 죽음을 소련공산당과 연결시킴으로써, 즉 단지 민족주의자의 죽음이 아니라 공산주의자의 죽음으로 포장·미화시킴으로써 고려인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작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합니다.

그런 점에서 소련공산당 상부의 공식 평가 보고서가 아니라 소련의 변방 카자흐스탄 지역, 크즐오르다 주, 시르다리아 구역에서 소수민족 언어로 발행되는 조그마한 지역 신문에 실린, 당성이 충만한 소수민족 신문사 직원들 몇몇이 공산당의 통제하에 쓴 몇 줄짜리 부고 기사 내용 하나만으로는 홍범도 장군이 충직한 공산당원이었다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Q3 :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에서 독립군을 몰살시키는 데 가담하거나 앞장섰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홍 장군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참변에서 한국의 무장 독립군을 몰살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 2021년 8월 16일자, 인터넷 매체 『펜앤드마이크』

「‘독립군 학살 공모한 공산주의자’ 홍범도 유해 대전현충원 임시안치」 기사 중에서

 

“그때 홍범도는 소련군의 편에서 이 학살에 가담했다. (중략) 자유시 참변은 항일무장독립운동사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사건이며 홍범도는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며 이 참변에 가담했다.

– 2021년 8월 20일자, 인터넷 매체 『뉴데일리』

「[강규형 칼럼] 소련군 편들어 ‘자유시참변’ 가담… 홍범도의 ‘반민족행위’」 기사 중에서

 

“비록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고 하나 그 뒤 내용은 자유시 거기에서 거의 1500명 되는 우리 독립군의 씨가 마르는 데 주역이었습니다.

– 2022년 10월 24일, 정기국회 국정감사 국방위원회에서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현 국방부장관)의 발언

 

홍범도 장군이 (중략)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

– 2023년 8월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문

 

자유시참변은 현 러시아 스보보드니(자유시) 제야강변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주력이었던 대한독립군단이 홍범도 등 공산주의 계열 독립군을 앞장세운 소련군(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유혈진압당하며 괴멸된 사건을 말한다.”

– 2023년 8월 28일자, 인터넷 매체 『자유일보』

「홍범도, ‘자유시참변’에 앞장서 독립군 1400여 명 괴멸시켰다」 기사 중에서

 

“자유시(自由市)참변을 아는가? 1921년 소련 적군(赤軍)에 의해 우리 독립군 수백 수천 명이 몰살당한 끔찍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 무장독립군은 사실상 궤멸됐다. 사료에 의해 홍범도 장군이 이 사건에서 소련 편에 가담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중략) 그럼 우리 독립군을 살육했다는 사람을 다른 데도 아닌 육사에 모셔놓고 생도들에게 뭘 배우라는 것인가? 천보만보를 양보해도 동지를 학살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다”

– 2023년 8월 31일,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남긴 글

 

“이들의 포위 공격 당시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홍범도를 비롯하여 지청천(이청천), 최진동, 안무 등도 적군 편입에 반대한 동료를 몰살하는 편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여러 학자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 20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한국 독립운동의 흑역사 자유시 참변」 기사 중에서

 

A3 :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1)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참변 당시 사건의 현장에 없었습니다.

(2)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참변 당시 무력진압을 주도하거나 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없었으며 그러한 지위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3)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은 몰살당했다거나 약 1,500명의 독립군이 씨가 말랐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 없이 날조, 왜곡된 명백한 거짓입니다.

(4) 사실이 아닌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시참변의 가해자로 ‘소련’, ‘소련군’, ‘소련 적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 소련은 아직 수립되지도 않았습니다.

 

우선 자유시참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러시아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20년 4월 시베리아 지역에 원동공화국이 수립되고, 또한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를 전후로 간도 참변이 발발하자, 러시아 원동지역 및 중국령 간도에서 활동하는 모든 독립군 세력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일단 원동공화국 스바보드니(자유시)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통합 독립군 부대를 조직할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자 러시아 내 양대 한인 사회주의 세력인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에 독립군 통합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과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르쿠츠크파는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통합을 추진했고, 상해파는 대한의용군(사할린특립의용대)을 조직하여 통합을 추진했습니다. 자유시참변이란 그러한 갈등이 해소되지 못한 채 파국을 맞게 되면서 “1921628일 원동공화국 스바보드니(자유시) 수라젭카 구역에서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네스토르 칼란다리쉬빌리가 이끄는 부대가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지원을 받아 상해파 대한의용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홍범도 장군이 가담하여 독립군을 몰살시켰다는 주장은 사실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첫째, 우선 자유시참변은 스바보드니(자유시) 중심으로부터 남쪽으로 3~4km 떨어진 수라젭카에서 발발했는데,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참변 당시 수라젭카에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진압병력은 고려혁명군정의회 의장 겸 총사령관 칼란다리쉬빌리가 이르쿠츠크에서 이끌고 온 코카서스 기병연대 500여 명,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 제29연대 약 1000명을 합하여 총 1500여 명으로 모두 러시아인이거나 코카서스 출신 군인들이었습니다. 간도에서 온 홍범도 및 안무 부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르쿠츠크파의 핵심인 오하묵이 이끄는 자유대대 부대원나 심지어 칼란다리쉬빌리가 이르쿠츠크로부터 자유시로 이끌고 온 합동민족연대 내 한인 부대원 등 어떤 한국인도 진압 현장에 없었으며, 따라서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유시참변 당시 진압병력을 지휘했던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9연대장 말라호프와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칼란다리쉬빌리가 자유시참변 직후에 연명으로 인민혁명군 제2군 총사령관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명백하게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둘째,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참변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 및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무력진압에 대한 최종 결정, 명령 하달 및 작전 수행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를 주도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이에 개입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없었으며 그러한 지위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한인 독립군 부대 통합 과정과 관련된 권한은 전적으로 러시아 측, 즉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고려혁명군정의회 등에 있었으며 홍범도 등 간도에서 간 독립군 지도자들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셋째,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은 몰살당했으며, 약 1,500명의 독립군이 씨가 말랐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자유시참변의 피해자 수에 대해서는 가해자 측 주장과 피해자 측 주장의 차이가 크고 자료마다 통계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를 산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료를 보더라도 대한의용군 측 독립군 ‘1500명이 씨가 말랐다또는 몰살되었다, 즉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죽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국방위 소속 국회의원의 발언이나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문서에 이처럼 근거 없이 사망자 수를 부풀리고 ‘몰살’이나 ‘씨가 마르다’라는 거짓되고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에는 악의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에 가담하여 피해자들을 ‘몰살시키는 데 앞장섰다.’, ‘몰살시키는 데 협조했다’, ‘독립군의 씨가 마르는 데 주역이었다’, ‘몰살시켰던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 ‘독립군을 살육했다’, ‘동지를 학살했다’는 등의 주장은 악의적으로 날조, 왜곡된 거짓 주장입니다.

 

넷째, 사실이 아닌 내용, 즉 오류가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시참변과 관련하여 ‘소련’, ‘소련군’, ‘소련 적군’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쓰고 있는데, 1921년 당시 소련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일부러 알면서도 ‘홍범도 장군이 민족을 배반하고 소련 편에 서서 독립군을 공격했다’는 거짓된 프레임을 씌우고, ‘소련’이라는 단어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김일성에게 6·25전쟁 남침을 허가한 소련’을 연상시켜 홍범도 장군을 한국전쟁 및 북한과 연관지으려는 악의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Q4 :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에서 직접 총을 쏘거나 진압 과정에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가해자 측인 이르쿠츠크파, 즉 고려혁명군정의회의 편에 섬으로써 가해자가 피해자를 학살하는 데에 동조 또는 방조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홍범도는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 그가 같은 독립군을 공격하는 데까지 가담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 2021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 볼셰비키 홍범도에게 바친 최고 예우」 기사 중에서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중략) 자유시참변 사태는 1921년 6월에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이 공격당한 사건을 말하는데,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는 평가임.”

– 2023년 8월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문

 

홍범도는 1921년 당시 만주에 산재한 무장독립군의 통합부대였던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라는 막중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1921년 6월 27일 자유시참변 때, 자신 휘하의 독립군을 데리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쪽에 가담하여 가해자가 되었다. (중략) 홍범도는 여기서 소련공산당의 완전한 하부조직인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면서 같은 한인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가해자가 되었다.

– 2023년 8월 28일자, 인터넷 매체 『자유일보』

「홍범도, ‘자유시참변’에 앞장서 독립군 1400여 명 괴멸시켰다」 기사 중에서

 

 

A4 : 그렇지 않습니다.

(1) 홍범도 장군은 초기에는 상해파가 주도하는 대한의용군에 합류했으며, 후기에는 이르쿠츠크파가 주도하는 고려혁명군에 합류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행보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통합을 주도하는 세력에 협조함으로써 마찰 없이 독립군 통합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2) 홍범도 장군은 가해자의 편에 가담하여 피해자를 무장해제, 학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유혈충돌을 막으려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3)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참변의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자유시참변의 최대 피해자는 홍범도 장군의 부하이자 동지인 허재욱(허근) 부대의 의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국방부와 일부 극우 언론은 홍범도 장군이 이르쿠츠크파의 고려혁명군정의회 쪽으로 이동한 것을 두고 가해자의 편에 섰다며 마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부 극우 인사 및 국방부의 주장에 나오는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라는 부분은 ‘홍범도는 비굴 혹은 비겁하게 가해자의 편을 드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했다’라는 뉘앙스를 풍김으로써 홍범도 장군을 비방하려는 악의적 표현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국방부는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소련공산당은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역시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일부러 ‘홍범도가 소련공산당 편을 들었다’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전후 맥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해석이며, 오히려 홍범도 장군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에 가깝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앞서 살펴봤듯 자유시참변의 주된 갈등의 축은 러시아령 양대 한인 공산주의 독립운동 세력인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간도 독립군으로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로 이동한 목적은 오직 하나, 한인 무장세력을 통합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제대로 된 항일무장투쟁을 하여 독립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미 간도에 있을 때부터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부대의 통합을 중시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참여한 독립군의 삼단연합이었기 때문입니다.

홍범도 장군이 1921년 6월 2일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합류한 이유 역시 독립군의 분열을 막고 통합에 찬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1년 3월에 자유시에 도착했을 당시에 모든 간도 독립군 부대 및 거의 모든 연해주 독립군 부대들과 함께 상해파의 대한의용군에 합류했습니다. 그 이유는 통합의 주체인 원동공화국 측이 상해파 즉, 대한의용군의 깃발 아래로 통합하라는 명령을 이미 내린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홍범도 장군의 입장에서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월이 되어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의 통합에 관한 전권이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에게로 넘어갔고, 이르쿠츠크파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원동공화국과 러시아 중앙 정부와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불필요하게 러시아 측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되었든 주도권을 쥔 쪽의 권위를 인정하여 큰 마찰 없이 통합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대한의용군 사령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주도권을 뺏기느니 차라리 독립군 통합을 포기하고 북간도로 가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홍범도 장군을 포함한 북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은 사령부의 지시에 반대하며, 이르쿠츠크파와의 평화적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양자 간 갈등과 상호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설득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에게 선택지는 2개밖에 없었습니다. 대한의용군 지도부를 따라 통합을 포기하고 북간도로 되돌아가는 것과 고려혁명군정의회로 가서 통합에 힘을 보태는 것. 그런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과 다른 모든 북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은 통합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둘째, 홍범도 장군은 가해자의 편에 가담하여 피해자를 무장해제, 학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유혈충돌을 막으려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1921년 4월 코민테른 원동비서부가 통합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원동공화국도 이를 수용하게 되면서 이르쿠츠크파 중심의 통합이 사실상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는 대한의용군 측의 반발에 대해 초강경책을 펴 상해파 조직인 러시아공산당 원동총국 한인부와 아무르주 한인공산당을 해체하였으며, 상해파 간부들을 당에서 제명하고, 반혁명 혐의로 체포, 투옥시켰습니다. 바로 그 시기인 56일 홍범도, 최진동 장군은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의 무장충돌을 우려하여 자유시로 찾아가 평화적인 통일책을 협의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의용군 사령부는 이 조치를 분열책으로 간주하고 홍범도, 최진동 장군을 가택연금시켰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홍범도 장군은 6월 2일 자유시로 가서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합류했는데, 6월 12일에 군정의회 지도부는 대한의용군 무장해제안을 두고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때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북간도 독립군 부대와 이르쿠츠크 합동민족연대 병사들은 무장해제안에 반대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대한의용군 측의 요구대로 군정의회 간부인 오하묵, 김하석, 최고려의 퇴진을 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 역시 홍범도 장군이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유혈충돌을 막고, 독립군 부대를 평화적으로 통합시키려고 노력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셋째,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참변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입니다. 자유시참변 당시 현장에서 사살된 사람은 36~37명이었는데 이들은 최진동 부대와 허재욱(허근) 부대가 통합되어 결성된 총군부 소속으로서 더 자세히는 허재욱의 옛 의군부 부대원들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간도 독립군들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쪽으로 넘어왔지만 허재욱의 부대원들 중 일부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밝혔듯 허재욱은 1907년 의병 시절부터 홍범도 장군과 함께 활동했던 오래된 전우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된 부대원들은 사실상 자신의 부대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유시참변 당시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애국지사 최계립(최봉설)의 증언 기록이 이를 방증합니다.

 

 

Q5 :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 과정에서 직접 총을 쏘거나 가해자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고 해도 자유시참변 이후에 재판위원으로서 생존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결국 가해자의 편에 선 것은 사실이 아닌가요?

홍범도 장군이 (중략) 소련공산당의 자유시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중략)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임.

– 2023년 8월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문

 

“홍범도가 이 학살에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해자인 볼셰비키 편에 섰던 것은 사실이다.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체포된 독립군 860여 명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홍범도는 재판위원을 맡았다. 재판 결과 상당수 독립군이 수용소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에도 독립운동 진영에서 ‘홍범도 책임론’이 팽배해 그를 배신자로 모는가 하면 암살을 시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 2023년 8월 31일자, 『조선일보』

「자유시참변 때 가해자 볼셰비키 편에 서… 홍범도, 육사 롤모델 될 수 있나」 기사 중에서

 

 

A5 :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1) 이르쿠츠크파는 자유시참변 이후 비난이 쇄도하여 곤란하게 되자 홍범도 장군의 명의를 도용하여 상해파를 비난하는 문서를 발표하고, 또 홍범도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참여케 하는 등 홍범도 장군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2) 그러한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의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의 수와 형량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3) 또한 홍범도 장군은 재판이 끝난 이후, 자유시참변 수습을 위해 코민테른 측과 협상하는 자리에 상해파의 핵심 인물인 김동한에게 전권을 위임함으로써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자유시참변의 피해자 중 생포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을 때,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 두고 국방부와 일부 언론은 ‘홍범도가 자유시참변에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닐지라도 추후에 가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으므로 가해자나 마찬가지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일단 재판위원으로 참여하기는 했지만 결코 그들의 뜻대로 끌려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시참변이 발생한 지 2개월 남짓 후인 1921년 9월 초에 간도 독립군 11개 단체는 자유시참변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하여 이르쿠츠크파를 강력히 비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르쿠츠크파는 그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9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 「우리 고려 노동 군중의게[에게]」, 「자유시사변에 대한 의병장들의 포고」, 「경고문」 등의 문서를 쏟아내며 상해파를 비판하고 이르쿠츠크파 자신을 옹호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르쿠츠크파는 이 문건들의 작성자로서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허근), 안무, 이청천(지청천)의 명의를 도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는 코민테른에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허재욱과 이병채를 모스크바로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허재욱과 이병채는 오히려 이르쿠츠크파를 비판하는 보고서를 10월 25일에 제출하여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보고서에서 이르쿠츠크파가 온갖 협박과 탄압 조치를 다 해가며, 홍범도 장군 대신 자신들을 파견했는데, 그 이유는 홍범도 장군을 파견할 경우 독립군이 희생된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상해파의 핵심인 이동휘 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이르쿠츠크파의 전횡과 자유시참변에 대해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는 이를 위해 조선문제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조선문제위원회는 11월에 15일 「코민테른 검사위원회 결정서」(11월 결정서)를 작성하여 자유시참변이발발한 것은 코민테른 원동비서부가 이르쿠츠크파를 일방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체포된 피해자 측 장교들의 석방 및 철저한 진상조사의 실시를 결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시참변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진 이르쿠츠크파는 피해자 측 장교들에 대한 재판을 통해 사태를 서둘러 수습하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재판위원으로 채동순(위원장), 박승만, 홍범도 3인을 선임했습니다. 채동순과 박승만은 이르쿠츠크 공산당의 주요 간부였으며, 홍범도 장군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중립적 입장의 인물로 포함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피해자 측이나 제3자 누가 보더라도 공정한 재판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당시 독립군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인물이자, 오랜 항일무장투쟁 경력으로 한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은 홍범도 장군을 들러리로 끼워 넣었던 것입니다. 즉 이르쿠츠크파 측은 「우리 고려 노동 군중의게[에게]」 등의 문서에 독립군 지도자들의 명의를 도용한 데 이어서 또다시 홍범도 장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홍범도 장군은 이르쿠츠크파가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순순히 굴복하여 요구에 응한 것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홍범도 장군이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에 참가했다’고 말했다는 애국지사 이인섭의 회고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홍범도 장군은 제약된 조건에서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자유시참변 희생자의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대한의용군 장교 총 50명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최종 판결 결과는 징역 2년 3명, 징역 1년 5명, 집행유예 24명, 방면 17명이었습니다. 이는 자유시참변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그렇게 가혹한 처벌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코민테른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르쿠츠크파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가혹하게 처벌할 수도, 또 지나치게 관대하게 처벌할 수도 없었으므로 적당한 범위와 형량의 유죄 판결을 내려 마무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위에서 언급한 이인섭의 회고대로 홍범도 장군이 노력한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은 재판 이후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1921년 12월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핵심인 이동휘와 홍도가 「11월 결정서」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교섭을 위해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고려국과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자유시참변 수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12월 14일에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허재욱, 이청천, 이병채 등 간도 독립군 장교 27명은 상해파의 핵심 인물인 김동한에게 자유시참변 관련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즉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반격을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참변 이후 이르쿠츠크파에게 명의를 도용당하고, 재판위원으로 이용당하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그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상황의 반전을 도모해 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Q6 : 홍범도 장군이 레닌을 만나러 간 것은 자유시참변을 보고하기 위함이었고, 레닌으로부터 상금과 군복과 권총을 선물 받은 것도 자유시참변에 협력한 대가였다는데요?

“홍범도. 자유시참변 때 독립군 수백 명을 학살한 소련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고 레닌으로부터 권총·군복·상금까지 받고, 소련공산당원이 됐습니다.”

– 2021년 8월 18일, 김문수(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

 

“홍범도는 그 직후 이런 협력의 대가로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 등을 선물로 받았다.

– 2021년 8월 20일자, 인터넷 매체 『뉴데일리』

「[강규형 칼럼] 소련군 편들어 ‘자유시참변’ 가담… 홍범도의 ‘반민족행위’」 기사 중에서

 

“그리고 레닌한테 가서 레닌의 권총도 받고, 소위 소련군이 된 이분을 굳이 흉상을 세우고 육사에 만들라고 했는지, (중략) 이거야말로 역사가 밝혀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 2022년 10월 24일, 정기국회 국정감사 국방위원회에서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현 국방부장관)의 발언

 

“구체적으로, 1991년 한·소 수교 직후 발굴한 소련 측 정부 문서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이 1930년대에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로 되어 있다는 것임. (중략) 그리고, 1922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대회’에 한인 대표 52명의 일원으로 참석하였고, 동년 레닌으로부터 권총, 상금, 친필 서명된 조선군대장증명서를 접수하였으며,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등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

– 2023년 8월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문

 

A6 :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1) 홍범도 장군은 레닌을 만나서 자유시참변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서 작전 수행 결과를 보고한다거나 가해자의 입장을 두둔, 변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가해자를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레닌이 홍범도 장군에게 선물을 준 것도 자유시참변에 협력했다거나 가해자 편에서 공을 세운 것에 대한 대가로 준 것이 아니라 항일 독립군 지도자로서의 공을 치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 또한 홍범도 장군은 레닌과의 만남 직후 러시아 측에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정책 담당자들의 범죄를 비판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원동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 56명의 일원으로 참가했습니다.

이 대회는 기본적으로 코민테른이 구미 제국주의 국가들의 회합인 워싱턴회의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원동지역의 각 약소민족들의 독립과 반제국주의 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이 대회는 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시참변 이후로 더욱 갈등의 골이 깊어진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주체로 인정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르쿠츠크파는 홍범도 장군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상해파의 이동휘에 맞서는 인물로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때 홍범도 장군은 대회 참가를 위한 조사표를 작성하게 되는데, 앞서 설명했다시피 [직업] 항목에 ‘의병’, [목적과 희망] 항목에 ‘고려 독립’이라고만 적었으며, [소속 정당 및 단체] 항목에 ‘없다’고 답했습니다. 즉 자신은 이르쿠츠크파도 아니고 상해파도 아니며, 어떠한 공산주의 정당이나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어느 쪽의 편을 들지도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홍범도 장군은 왜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일까요? 홍범도 장군은 1932년에 작성한 이력서에서 “레닌 동무에게 자유시에서 조선 의병들 사이에 유혈적 사변이 난 데 대해 보고하려고 1921년 동짓달에 모스크바에 조선 의병 대표로 갔다.”고 썼습니다. 혹자들은 이를 두고 ‘홍범도가 레닌에게 자유시참변에 대해 보고를 한 후 그에 대한 보상으로 상금과 권총과 러시아 적군 모자를 선물 받은 것’이라고 근거 없는 추측성 주장을 하며, 이 이력서야말로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에 가담하여 동지들을 죽이고 자기의 이익을 취했음을 보여주는 피할 수 없는 증거라며 맹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홍범도 장군의 방문 목적은 그와 반대로 자유시참변의 가해자인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선 홍범도 장군은 1922년 1월 하순에 레닌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레닌은 자유시참변과 관련하여 질문을 했고 홍범도 장군은 몇 마디로 답했습니다. 자유시참변에 대한 대화가 짧았던 이유는 1921년 11월 코민테른 조선문제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 즉 자유시참변에 이르쿠츠크파의 책임이 있다는 내용을 레닌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홍범도 장군과 레닌 사이의 자유시참변에 대한 대화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간단한 확인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홍범도 장군의 답변도 11월 결정서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책임론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만약 홍범도 장군이 「11월 결정서」와 달리 이르쿠츠크파를 옹호하고 나섰더라면 레닌의 질문도 더 많아졌을 것이고, 홍범도 장군의 답변도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레닌이 홍범도 장군에게 선물을 준 것도 자유시참변에 협력했다거나 가해자 편에서 공을 세운 것에 대한 대가로 준 것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항일 독립군 지도자로서의 공을 치하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레닌이 홍범도 장군에게 친필서명한 ‘조선군대장’이라는 증명서를 주었다는 애국지사 김승빈의 기록이 이를 방증합니다. 참고로 홍범도 장군은 이때 레닌에게서 받은 상금 100루블을 곧바로 함공후원회와 세계혁명자후원회에 기부했습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레닌과의 만남 직후인 1922년 2월 러시아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 참모총장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최진동, 김동한과 공동 명의로 「조선 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보고서의 목적은 원동에서의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정책 담당자들의 범죄를 밝히기 위함이라 적고 있습니다. 보고서에서 홍범도 장군은 이르쿠츠크파의 슈미야츠키, 최고려, 김하석, 오하묵, 김철훈을 ‘4천년 조선의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살인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조속한 퇴진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패배들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던 동지들에게 배신자로 되어 경멸을 받기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시참변의 결과에 겁을 먹고 있으며, 범죄를 은폐하려고 간도 독립군 지도자의 명의를 도용하여 각종 성명서를 발표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Q7 : 홍범도 장군이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자유시참변에 책임이 없다고 해도, 어쨌든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고, 또 육사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북한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한 장교를 길러내는 곳이니까,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육사에서 치우는 게 맞는 것 아닌가요?

육군사관학교는 공산주의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호국간성을 양성하는 기관임. 6·25전쟁 발발 당시 육사 선배님들은 전선에 투입되어 북한 공산군에 맞서 싸웠고, 6·25전쟁 기간에 다시 개교하여 지금까지 북한과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 왔음.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 사관생도 교육을 고려할 때 소련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 논란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 더욱이 사관생도 교육의 상징적 건물인 충무관 중앙현관에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이 있어 왔음. (중략)

따라서,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하되, 이후 소련공산당 활동에 동조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달리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봄. 더욱이,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불법 남침하여 6·25전쟁을 자행한 엄연한 사실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 시 적절하지 않음.

앞으로 육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내 기념물 재정비계획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장교 양성이라는 학교의 정체성에 맞게 최적화된 교육환경을 조성할 것임. 특히, 사관생도들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포함하여 국난 극복의 역사 전체를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할 것임. (중략)

국방부는 육사를 포함한 사관학교들이 독립운동과 6·25전쟁을 포함하여 순국선열과 호국영웅들을 추모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예강군으로 육성하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임.”

– 2023년 8월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문

 

“홍범도 장군은 독립투사로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업적이 있다. 다만, 자유시참변과 1927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스탈린 체제의 소련공산당에 가입하는 등 1921년 이후 행적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논란이 있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김일성 공산당의 뿌리가 되는 레닌·스탈린 공산당 당원으로서의 삶을 영위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자유시참변을 일으켰던 고려혁명군 측에 가담하고, 자유시참변 재판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레닌으로부터 상금·권총과 모자를 선물 받고, 스탈린 체제의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지만, 육사에 홍범도 장군 흉상이 있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 2023년 9월 25일, 국회 국방위원회 인사청문회를 위한

국방부장관 후보자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현 국방부장관)의 서면 답변 자료

 

A7 :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논리입니다.

(1) 대한민국 군대의 정체성은 대한민국을 침략하는 모든 세력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키는 것이지, 결코 북한이나 공산주의 세력이라고 하는 특정 대상으로부터만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북한이 대한민국의 주적이 될 수는 있어도 중국이나 베트남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공산주의 세력을 대한민국의 주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이제는 사라진 20세기의 소련공산당을 21세기 대한민국 군대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2) 홍범도 장군은 자신이 살던 시기에 마땅히 해야 할 대한민국 군대의 본연의 임무, 즉 적국 일본에 맞서 싸워 국가를 되찾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주적 일본에 맞서기 위해 당시의 우방인 러시아/소련과 협력 작전을 도모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홍범도 장군은 대한민국 군대 및 육사의 정체성에 너무나도 잘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3) 국방부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로 포장된 반공주의를 강조하며,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것은 매우 극단적이며 위험한 발상입니다. 극단적 반공주의는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헌법적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반공주의가 사상통제 체제로 작용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 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며 실제로는 극단적 반공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이야말로,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공 전체주의자이자 반공 파시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담긴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군사관학교의 정체성은 공산주의와 북한의 침략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장교를 길러내는 곳이다.

(2) 그런데 홍범도는 독립운동을 했건 어쨌건 간에 스탈린 체제의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3) 소련공산당은 김일성 공산당의 뿌리가 된다.

(4) 무엇보다도 김일성이 불법 남침하여 6·25전쟁을 자행한 것은 소련공산당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5) 따라서, 육사의 정체성에 비추어 볼 때 홍범도 장군은 육사와는 맞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육사의 정체성, 이를 더 확대하여 대한민국 군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지키는 것일까요? 대한민국을 침략하는 모든 외부세력으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 단지 북한이나 공산주의 세력이라고 하는 특정 대상으로부터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침략한다면 맞서 싸워 지키는 것입니다.

혹자는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킨 세력이고,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냐고, 그리고 북한은 공산주의 세력이므로 우리의 주적은 또한 공산주의가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우리의 주적이 북한이라는 주장은 일정 부분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하거나 침략을 시도한다면 당연히 북한은 대한민국의 주적이 되며, 대한민국 군대는 이에 맞서 싸워 대한민국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적이 공산주의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대한민국 군대의 적은 이 세상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다면 우리 군대는 중국공산당, 베트남공산당, 프랑스공산당, 스페인공산당, 미국공산당, 인도공산당, 일본공산당 등을 적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국가인 중국, 베트남 등과 국교를 단절하고 적국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즉, 북한이 공산주의 체제를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공산주의 세력과 체제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이제는 사라진 20세기의 소련공산당을 21세기 대한민국 군대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유령과 싸우겠다는 것이며 어불성설입니다.

둘째, 홍범도 장군은 소련공산당에 입당했기 때문에 우리 군대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다는 주장은 과연 맞는 말일까요? 홍범도 장군이 살던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적은 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소련은 우리의 주적 일본에 맞서기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우방이었습니다. 전 세계 인류 전쟁 역사상 우방 없이 단독으로만 전쟁을 치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약소국은 말할 것도 없고 강대국들도 그러합니다. 또한 국제정치의 현실은 냉혹하기 때문에 그러한 우방은 언제든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당시 및 일제강점기에 적국 일본의 편이었지만 제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우방이었으며, 현재는 ‘동맹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러시아/소련은 일제강점기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우리의 우방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적국이었으며, 현재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자신이 살던 시기에 마땅히 해야 할 대한민국 군대의 본연의 임무, 즉 적국일본에 맞서 싸워 국가를 되찾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주적 일본에 맞서기 위해 당시의 우방 러시아/소련과 협력 작전을 도모했습니다. 이승만도 적국 일본에 맞서기 위해 미국을 우방으로 삼아 독립운동을 했고, 김구도 적국 일본에 맞서기 위해 중국을 우방으로 삼아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승만, 김구와 홍범도는 다르지 않습니다. 즉 홍범도 장군은 대한민국 군의 정체성이나 육사의 정체성에 안 맞는다는 근거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우리 군과 육사의 정체성에 너무나도 잘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육사에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세워 기념하고 우리 군의 뿌리이자 생도들의 귀감으로 삼는 것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홍범도 장군이 가입한 1927년의 소련공산당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의 소련공산당이나 북한 김일성의 조선로동당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23년 후에 어떤 나라와 어떤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될지 예언을 해서 꼭 맞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셋째, 국방부의 입장문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헌법에 나와 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추구하므로, 대한민국의 군대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곧 ‘반공주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흔히 선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알려진 모든 나라에는 공산당이 존재하며, 사상의 자유가 존재합니다. 물론 혹자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상황이 다르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에는 현재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에서 흔히 좌파라고 불리는 정당들도 유럽의 정치 지형과 비교하면 중도 좌파에도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시민들의 절대 다수가 6·25전쟁 등의 경험을 통해 북한이 추구했던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한국 실정에서는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투표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런 상황에서 국방부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로 포장된 반공주의를 강조하여 이를 군대와 육사의 정체성으로 내세워 굳이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것은 매우 극단적인 생각이며, 그 의도가 매우 의심스러운 위험한 발상입니다. 극단적 반공주의는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헌법적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반공주의가 사상통제 체제로 작용하여 시민들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한 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입니다. 실제로 나치 독일의 히틀러도, 일본제국주의의 천황제 군국주의 파시즘도 모두 극단적인 반공주의였습니다. 히틀러는 반공주의를 내세워 권력을 장악했고, 일제는 반공주의를 내세워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들도 반공주의를 내세워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했으며 심지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군대는 그들의 비뚤어진 욕망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요즘 공산 전체주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공산 전체주의 세력이 반일감정을 선동하여 자유 세계를 교란시키고 공격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며 실제로는 극단적 반공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역사와 사상을 자기 입맛대로 처리하려는 세력이야말로, 또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을 철거하는 행위를 통해 비뚤어진 역사관에 집착하고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야말로.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군대를 ‘사상 군대’로 만들고 육사생도들을 ‘반공 기계’로 만들려는 자들이야말로,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공 전체주의자이자 히틀러와 일제 군국주의를 그리워하는 반공 파시스트가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