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 기록화
출처: 독립기념관

1920년 독립전쟁의 첫 승리, 봉오동전투의 역사적 의의

반 병 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

〈〉 2020년 소식지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독립전쟁의 해’, 봉오동전투 승리 100주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0년은 3·1운동 1주년이 되는 해이다. 1920년, 우리 민족은 자유와 독립을 위한 반제반식민지 민족해방투
쟁전선에서 당당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계사적 측면에서 볼 때, 1년 전의 3·1운동이 평화적 시위운동의 선구였다면, 봉오동 전투로 시작된 1920년의 항일무장투쟁은 반제반식민지 무장투쟁의 선봉이었다고 할 것이다.

상해의 통합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3일, 오랜 우여곡절 끝에 국내외 동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출범하였다. 이러한 통일적 분위기에서 통합임시정부 국무원은 임시정부의 시정방침의 대강(大綱)으로 ‘우리 국민이 단정(斷定) 실행할 6대사(六大事)’, 즉 군사, 외교, 교육, 사법, 재정, 통일의 여섯 개 과업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군사’를 최우선의 첫 번째 과업으로 설정하면서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였다. 독립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자주와 독립을 가져다 줄 최고단계의 독립운동이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그동안 견지했던 평화적인 독립운동을 독립전쟁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한편으로 미국 등 서구열강의 도움을 기대했던 평화적 만세시위운동으로서 3·1운동이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좌절된데 대한 반성의 결과였다. 3·1운동은 전민족적 대일항쟁이라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할 미국과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지나친 낙관적 기대에 근거하여 기획. 준비된 것이었다. 이처럼 기획된 3·1운동은 처음부터 우리의 힘이 아니라 남의 힘을 빌어 독립을 얻자는 대외의존적 노선이었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7천여 명의 피살자를 비롯하여 너무 많은 희생과 민족적 역량의 소모를 가져온 운동이었다.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선포’는 한말이래 1910년대에 걸쳐 러시아 연해주와 서북간도 독립운동세력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항일무력투쟁노선이 독립운동의 기본노선으로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일본과의 외교적 타협을 한 러시아와 중국당국에 의해서 탄압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같은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과 시베리아 내전에 ‘공동출병’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주도할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상정될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봉오동전투의 승리, 북간도 항일무장세력의 단합의 결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일본과 맞서 ‘독립전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동포들의 ‘일심일체로의 단합’이 필수적이었다. 특히, 독립전쟁의 중추가 될 중국과 러시아 동포들, 구체적으로는 3·1운동 이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서북간도 항일무장단체들의 단합과 통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항일무장단체들의 연합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 왕삼덕, 안정근 등 특파원들을 북간도로 급파하였다.

독립군단체들 역시 대외적으로 각자의 종교적, 지역적 배경을 뛰어넘는 명실상부한 통일을 제창하면서 1920년 3월 이후 8월 중반까지 연합회의를 가졌고, 특히 5월 중순 이후에는 임정특파원들이 가세하여 연합을 서둘렀다. 봉오동에서의 승리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군무도독부, 대한국민회 세 단체의 연합세력(북로독군부)과 신민단 등 북간도 지역 항일무장단체들이 합심하여 일궈낸 승리였다. 북로군정서가 불참하여 부분적인 연합에 그쳤지만 북간도지역 독립군단체 일부의 연합작전의 성과였던 것이다. 이 점이 분열된 상태에서일본군과 맞닥뜨렸던 청산리전투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봉오동전투에서의 승리를 스스로 선포했던 바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명명했고, 봉오동전투 승리를 이끈 3단연합의 한 축인 북간도 국민회의 간부들은 “독립전쟁의 개시”,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라며 국내외에 승전보를 알렸던 것이다.

농민대중, 민초들의 전폭적 지원으로 얻어낸 승리

 

1919년 가을 본격적인 항일무장항쟁에 나서기 위한 전열을 정비했던 독립군들은 1920년 3월이후 6월초에 이르기까지 30여회에 걸쳐 두만강을 건너 국경의 일본수비대를 공격하였다. 6월 4일 독립군 1개소대가 월강하여 종성의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고 돌아가자, 일제당국은 독립군을 멸살하고자 추격대와 토벌대를 편성하여 월강하였다. 일본군의 섣부른 과소평가와 달리, 독립군은 체제 정연하고 규율이 엄연했으며, 체코군과 러시아군으로부터 확보한 무기를 구비한, 그야말로 정규군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봉오동의 지리적 사정에 밝은데다 노련미까지 갖춘 홍범도 등 독립군 지휘부의 매복 전에 걸려든 일본군은 쓰라린 패배의 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현지 국민회 제2북부지방회장 김정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군 장교 3명, 병사 49명 전사,아군 2명 전사, 경상 2명. 임시정부는 적군 157명 전사]

봉오동전투 이후 일제는 독립군 활동의 배후에 서북간도 한인동포사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해 있던 한인 농민들은 군자금을 비롯하여 식량과 의복을 제공하였으며 적의 동향에 대한 정보 전달 등 헌신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봉오동전투를 지휘했던 독립군사령관 홍범도는 동포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고 스스로 동포들의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는 점을 몸소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산천을 떠나 타국의 영토를 떠돌아다니며 비참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동포들로부터 금전과 곡식의 의연을 받고 있는 것이 심대한데, 만일 우리가 독립의 뜻을 버리거나 세계 각국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있다면”“우리 동포들에게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고 말하여 농민들로부터 폭넓은 동감과 신뢰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공격에 대해 분풀이라도 하듯, 24명 가량의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였고, 이들을 독립군 전사자로 발표하는 뻔뻔함까지 드러내었다. 일본군의 양민학살은 심각한 야만적 전쟁범죄행위이며,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의병전쟁 당시 그리고 3·1운동 당시 비무장 상태의 평화적 양민들을 총칼로 진압하던 학살행위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보복적 만행으로서의 경신참변 

 

일제는 식민지체제에 크나큰 위협을 주고 있는 독립군을 근절하고 이들 독립군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서북간도의 한인사회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와 학살에 나섰다. 이를 위하여 일제는 고육지책으로 만주 마적을 동원하여 일본영사관을 공격케 한 훈춘사건(10월 2일)을 조작하여 ‘출병’의 명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조선군, 관동군, 시베리아 침략군 등을 망라한 2만 5천명에 달하는 일본 침략군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포위하듯이 서북간도 각지를 점령하였다. 홍범도는 자신의 일지에서 “일병(日兵)이 로씨야에서 철병하여 나오는 놈이 수만 명이 북간도에 폭 덮었다”라고 회상했다.

일본군의 간도 침공은 또한 중국 주권에 대한 심대한 침해였으며 침략행위였다. 이후 10월 9일부터 11월 31일까지의 2개월 동안 일본군은 서북간도를 횡행하며 무고한 평화적 농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일본 침략군은 3천 5백명에 달하는 한인 농민들이 학살하였으며, 민가, 학교, 교회를 불지르고 파괴하고 재산을 강탈하였다. 성인 남자들을 보이는대로 잡아 죽이고, 심지어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무도 불법의 일본군은 무고한 농민들을 불에 태워 죽이고, 총과 도검으로 쏘고 찔러 죽였다.

할아버지와 손자,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아기를 잉태한 산모 등을 가리지 않고 일본군은 극악무도한 학살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였다. 앞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4월 4~5일 동포 수십명이 학살당한 연해주에서의 4월 참변은 일본 간섭군에 의한 집단학살의 서곡이었으며, 청산리 전투를 전후로 하여 10-11월 2개월에 걸친 서북간도에서의 경신참변은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과 만행의 절정이었다. 장암동 마을 학살 등 일본군의 만행은 선교사를 통해 외부로 알려졌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간도에서 참살당한 동포들을 위한 추도식에서 ”세계 고금에 이와 같은 극히 참혹한 혈사(血史)가 어디 있으며, 이와 같이 잔학한 야만 종족이 있는가“며 개탄하였다.(임시정부 주최 순국제열 추도회. 1920년 12월 10일)

봉오동 전투 승리의 의의와 교훈 

 

봉오동전투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 봉오동 전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1년 전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의 미국 등 서구열강이 우리의 독립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대외의존적 사대주의를 극복하고 우리의 힘으로 일궈낸 승리였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아시아 최강, 세계 3위의 막강한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서 북로군정서 등 일부가 불참했지만 북간도 항일무장세력의 연합에 의한 쾌거였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조선시대 내내 지역적 차별과 지배계급의 착취에 억눌려 살았던 민초들, 함경도 농민들의 성원과 희생으로 가능하였다. 일제 당국은 항일무장투쟁의 원천을 말살하고자 한인사회에 대한 대대적 파괴와 잔인무도한 학살로 보복하였다. 경신참변은 일제식민지 통치의 비인간적, 비인도적 잔인성과 가혹한 참상을 절감케 하는 또 하나의 참극이었다.

이처럼 1920년 한 해는 우리 동포들에게 승리의 기쁨 못지않게 생지옥과 같은 비극적 참상의 한 해였다. 지나간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엄격하고 처절하다. 상상 이상으로 천인공노할 학살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마다 더욱 그렇게 느낀다. 40주년을 맞고 있는 5.18의 영상들을 보면서 경신참변 등 일제의 학살의 역사를 떠올리며 그 닮음꼴에 전율을 느낀다.

봉오동 전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이념, 종교, 지역을 뛰어넘는 민족대단결, 외세의 개입 없는 자주적 독립노선, 평범한 민초들의 지지와 신뢰의 중요성 등이 될 것이다.

남북이 경쟁을 한다면, 평화적인 공존공영을 전제로 하는 경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누가 민족공동체의 가치를 우선시하는가, 누가 민족공동체를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하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을 배척하고 말살하는 반민족적 배신이나 반칙 없이, 같은 민족으로서의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경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만이 자주와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견지하는 가운데 민족통일의 길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