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 기록화
출처: 독립기념관

봉오동 전투의 배경과 의미

임성욱(홍범도아카데미 전문위원)

〈〉 2023년 소식지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봉오동 전투 새롭게 보기

 

올해는 봉오동 전투 승리 103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특히 한국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봉오동 전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봉오동 전투란 간단히 말해 “1920년 6월 7일 중국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에서 대한북로독군부 및 대한신민단으로 구성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소속 월강추격대대를 상대로 유인 매복 작전을 펼쳐 통쾌하게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봉오동 전투의 의의는 “강제 병합 이후 한국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린 사건,
독립전쟁 제1회전의 짜릿한 승리, 독립군과 우리 민족 전체의 독립 의지와 사기를 드높인 사건.” 등의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봉오동 전투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지식, 교과서적인 이해를 넘어 좀 더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봉오동 전투의 전개 과정, 결과 및 의의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책과 논문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을 뿐만아니라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본지 「날으는 홍범도장군」에서도 이미 수차례에 걸쳐 여러 저명한 학자 및 선생님들께서 글을 써 주셨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그동안 잘 다뤄지지 않았던 측면에 주목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봉오동 전투가 갖는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왜 일본은 봉오동을 침략했나?

 

봉오동 전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주로 주목하는 부분은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웠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에 대해 논할 때 ‘싸움 그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 측과 상대 측 부대의 지휘관들은 각각 누구 누구였는지, 우리 측과 상대 측의 병력 수와 편제, 무기는 각각 어떠했는지, 전투의 전개 과정은 어땠는지, 우리 측과 상대 측의 전투 목표,
전략, 전술은 각각 어땠는지, 그리고 우리 측과 상대 측의 전과, 즉 사망자, 부상자 수는 각각 얼마나 됐는지 등등…

 

그런데 봉오동 전투를 말할 때 정작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독립군과 일본군이 싸운 장소가 ‘봉오동’이라는 사실이다. 봉오동의 위치는 어디인지, 봉오동의 특징은 어떠한지, 그리고 왜 독립군과 일본군은 하필 봉오동에서 싸웠는지 등등…

 

봉오동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점을 말하자면 봉오동은 간도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간도는 주지하다시피 중국 영토에 있기는 하지만 한민족의 생활 터전이다. 그렇다면 일본군 월강추격대대가 봉오동으로 가서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일본군이 봉오동을, 간도를 침략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일본군은 왜 봉오동을 침략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봉오동 전투 직전의 국제 정세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러시아 내전’ 및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군 파병’ 그리고 ‘일본의 시베리아 침공’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러시아의 상황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7년 3월, 러시아 민중의 봉기로 전제군주국 러시아가 무너졌다.(2월 혁명)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는 소비에트가 결성되었고, 자본가와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임시정부의 수반은 케렌스키였으며, 그는 병사들의 뜻에 반해 제1차세계대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볼셰비키 중심의 소비에트가 권력을 차지했다.(10월 혁명) 소비에트는 공약으로서 제1차세계대전 교전국과의 강화, 토지의 무상 몰수 및 농민위원회 인도, 군대 민주화, 노동자 통제, 민족 자결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공약은 노동자·농민·하급 군인 등 대다수 민중에게 환영을 받았지만, 지주·귀족·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다. 그들은 이에 반발하여 혁명 정부 타도 및 제정 러시아 부활을 주장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혁명이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바로 두 개의 세력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곧 혁명세력인 적군과 반혁명 세력인 백군 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러시아 내전)

 

한편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협상국 측은 사회주의 국가 탄생 자체에 대해 불안함을 느꼈다. 게다가 혁명 정부가 1918년 3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제1차세계대전에서 이탈하자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를 전선에 묶어 두기 위해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백군을 지원하는 군사 개입을 추진 하였다.(제국주의 간섭 전쟁)

일본의 시베리아 침공

 

바로 이 시기 일본은 이러한 러시아 내전과 국제 간섭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아시아 대륙 침략의 야망을 실현시킬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당시 연해주는 1917년 12월 하바롭스크에서 원동소비에트가 수립되어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알렉산드라가 외무위원을 맡았다. 또한 그 영향하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8년 1월 일본 해군은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함을 입항시켰으며, 4월에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한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군단(체코군단)은 레닌 정부와의 합의하에 러시아 적군과 백군 양측에 대해 중립을 지키며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유럽 전선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5월에 첼랴빈스크에 있던 체코군단과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헝가리 포로들 간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볼셰비키 정부는 체코군단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체코군단이 이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체코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방향을 돌려 백군과 함께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시작 했다. 이로 인해 레닌 정부는 시베리아횡단철도 및 시베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으며 시베리아를 비롯한 러시아 동부 지역에서 백군의 반격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이제 체코군단은 볼셰비키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프랑스 등 협상국 측은 체코군단 구출을 이유로 미국과 일본에 파병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은 8월에 본격적인 파병을 시작하여 3개 사단 약 72,000명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냈다. 이는 미국군 9,000명, 영국군 7,000명, 중국군 2,000명, 이탈리아군 1,400명, 프랑스군 1,300명에 비해 압도적인 수였다. 이러한 막대한 수적 우세에 힘입어 일본군은 미군을 제외한 나머지 협상국 측 간섭군 전체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시베리아횡단철도 및 중국동부철도(중동철도)가 지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바롭스크, 아무르주, 만주리, 자바이칼주의 치타까지 진격하여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다. 이러한 일본의 폭주는 같은 협상국인 미국조차도 크게 우려를 나타낼 정도였다.

 

한편 일본군을 중심으로 하는 간섭군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원동 지역의 전세는 백군의 우세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하바롭스크의 원동소비에트는 9월 초에 백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이때 김알렉산드라도 백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일본군은 점령 지역을 중심으로 옴스크의 콜차크 정부는 물론 자바이칼 지역의 세묘노프 부대, 중동철도 지역의 호르바트 부대, 아무르주 지역의 칼미코프 부대, 연해주 지역의 라자노프 정권 등 반볼셰비키 세력을 도와 시베리아 및 원동 지역의 혁명 세력을 공격, 파괴해 나갔다.

적군의 승리, 간섭군의 철수 

 

그런 상황에서 11월 11일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되었으며, 그에 따라 간섭 전쟁의 1차 목표 즉, 러시아를 전쟁에 다시 끌어들여 동부전선을 재건하겠다는 목표는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적군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고, 체코군단도 아직 귀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베리아 간섭군의 존재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1919년이 되어서 국제 정세의 가장 큰 이슈는 제1차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였다. 협상국 측은 한편으로는 파리에서 모여 패전국인 동맹국에 대해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레닌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러시아의 내전에 개입하여 백군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전 초기 체코군단의 반란 및 간섭군 파병 이래 줄곧 백군에 밀리며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있던 적군은 1919년 중반 이후 백군에 대한 반격에 성공을 거두며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결국 11월 14일 콜차크 정부는 적군에게 옴스크를 내주고 이르쿠츠크로 퇴각했으며, 1920년 1월 초에는 사회혁명당계에게 이르쿠츠크를 내주게 되었다. 급기야 1920년 2월 체코군단은 백군을 배신하고 콜차크를 적군에게 넘겨버림으로써 백군 정부가 완전히 무너졌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는 1월 말에, 하바롭스크는 2월 중순에 적군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러시아 내전은 사실상 적군의 승리로 끝나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을 비롯한 간섭군 측은 백군 잔당을 지원하여 ‘레닌 정부를 타도’할 가능성도 희박하고, 적군편으로 돌아선 ‘체코군단을 보호’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어 더이상 러시아 내전에 간섭하고 파병을 유지할 명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더구나 체코군단은 자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1920년 2월부터 귀환이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1920년 1월 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 등은 모두 자국 군대를 시베리아로부터 철수했다.

일본만 철군하지 않은 이유

 

그러나 오직 일본만은 철군을 거부하고 계속 주둔했다. 일본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아직 체코군단이 완전히 귀환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마무리하겠다는 것이었지만, 그 속내는 엄청난 군비를 들여 군대를 파병했는데 영토를 획득하지도, 괴뢰국을 수립하지도, 경제적 이권을 얻어내지도 못한 채 아무런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철군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에는 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 내전에서 수많은 연해주 한인들이 러시아 적군과 결합하여 빨치산 투쟁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상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 었으므로 간섭군이 모두 철군한다면 볼셰비키 세력이 러시아 전 지역을 접수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럴 경우 적군과 함께 싸운 한인 빨치산들이 레닌 정부로부터 혁명을 위해 투쟁한 공을 인정 받아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고, 그리하여 그 혁명의 불길을 조선으로 옮길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강경 진압에 분노를 느끼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찾아오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러시아 혁명 세력이나 연해주 한인 빨치산 세력과 결합하여 조선 내로 진격하거나 잠입하여 무장투쟁을 벌인다면, 그리하여 조선에서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발발한다면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 제국주의 체제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불과 얼마 전인 1919년 9월 2일 경성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노인 강우규가 속한 노인동맹단도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를 둔 단체였다. 그런 점에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강제 합병 이전부터 줄기차게 항일무장투쟁을 벌여온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존재였으며,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일본으로 철군할 경우 일본이 겪게 될  위기라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니콜라예프스크 사건(니항 사건)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마치 울고 싶은 차에 뺨을 맞은 격으로 일본인 교민 보호를 구실로 철군을 거부했다. 그리고 연해주 정부에 압력을 넣어 한인 항일세력의 무장을 해제 시키고는 4월 5일 연해주 참변을 저질러 한인혁명가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한인들을 학살하고 한인 사회를 초토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한인 민족운동가들을 끔찍하게 살해했다.

 

이렇게 연해주 참변을 통해 연해주 한인 사회를 초토화 시킴으로써 어느 정도 급한 불을 껐다고 판단한 일본은 곧바로 다음 대상지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간도였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타격 대상은 바로 봉오동이었다.

왜 하필 봉오동이었나?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하필 봉오동으로 들어왔을까?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문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군은 일부러 봉오동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삼둔자 전투를 벌인 박승길이 이끄는 신민단 소대를 추격하다가 그들이 봉오동 방향으로 도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쫓아가다 보니 봉오동으로 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봉오동이라는 장소는 일본군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박승길 소대는 처음부터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려고 했는가? 그리고 그러한 유인책은 처음부터 홍범도나 최진동이 계획한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박승길 소대의 원래 목표는 일본군을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삼둔자 맞은편인 함경북도 온성군 강양동으로 잠입하여 온성군 또는 종성군 지역을 습격하는 것, 즉 국내진공이었다. 단지 그 과정에서 강양동 국경초소의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전투를 벌였던 것이고 본의 아니게 월강추격대대를 봉오동으로 끌어들이게 되었을 뿐이다. 홍범도 역시도 일본군의 월강을 유도하거나 처음부터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월강추격대대가 봉오동 근처 고려령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 봉오동에서의 유인 섬멸 작전 계획을 세운 것이다. 즉 봉오동이라는 장소는 독립군이 처음부터 전투의 장소로서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독립군과 일본군이 봉오동이라는 장소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순전히 우연의 소산이라고 봐야 할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는 항일무장단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1910년 강제 합병 이래 서간도 및 북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무장투쟁을 위한 물적, 인적 기반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만주의 항일무장단체들은 1920년 상반기에 엄청난 기세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는데, 일본 측 기록과 독립신문의 자료를 종합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독립군에 의한 국내진공작전은 24회 있었으며, 3월부터 6월까지는 32회에 달했고, 일본 관공서와 순사파출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에 달했다. 평균 3일에 1회꼴로 국내진공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내진공작전의 공격대상지는 대부분 함경북도 온성 및 종성이었다. 또한 일본 기록에 따르면 북간도 독립군 단체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무력 침공을 감행한 부대는 최진동 부대였으며 3월부터 6월까지 무려 36회에 걸쳐 종성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함경북도 온성군과 종성군 수비에 최우선 순위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삼둔자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경 초소 경비대, 남양수비대 등을 상시적으로 가동시켜 놓았던 것이다. 또한 일본으로서 가장 골치 아픈 독립군 단체는 바로 최진동 부대였으며, 그 본거지인 봉오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군 제19사단은 삼둔자 전투의 소식을 듣고 바로 대규모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였으며, 이들의 추격 방향도 봉오동 쪽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삼둔자 전투로 월강한 일본군이 봉오동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은 완전한 우연은 아니었으며 언젠가 한번은 봉오동의 최진동을 손봐줘야겠다고 벼르던 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홍범도 부대,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 국민회가 통합하여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가 봉오동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봉오동은 간도의 어떤 다른 지역보다도 부대를 훈련시키기에도 좋고, 국내진공 작전을 전개하기에도 좋으며, 방어전을 펼치기에도 좋고, 러시아령으로 이동하기에도 좋은 지리적 조건과 지형적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게다가 봉오동을 근거지로 삼은 최진동 3형제는 막대한 군자금과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랬기에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봉오동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 것 역시도 완전한 우연은 아니었으며, 언젠가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생각해 보는 봉오동 전투의 역사적 의의

 

종합해보면 봉오동 전투는 ‘1917~1925년 러시아 내전 및 일본의 시베리아 침공으로 한인 빨치산 투쟁이 전개되던 러시아령 연해주라는 시공간’과 ‘1919~1921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한인 항일무장 투쟁이 전개 되던 중국령 간도라는 시공간’을 연결시켜 볼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명확히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독립군과 일본군이 봉오동이라는 장소에서 맞닥뜨리게 될 필연적 조건하에 우연적 요소가 겹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봉오동 전투의 의의는 ‘러시아 내전 및 3·1운동 이후 연해주 및 간도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이 거세지자 이를 식민지 체제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심각한 위기로 인식한 일본이 이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서 1차적으로 연해주 참변을 저지른 후 2차적으로 간도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1920년 6월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아시아 최강의 일본군이 독립군 최정예부대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침략하여 독립군을 공격한다’는 필연적 위기 상황을 ‘잘 준비된 독립군이 스스로 선택한 봉오동이라는 곳에서 오만한 일본 침략군을 격퇴하여 응징해낸다’는 필연적 해법으로 응수한 통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