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에 부쳐
봉오동전투의 두 주역 홍범도(왼쪽)와 최진동.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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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마침내 한반도로 귀환하게 됐다는 소식이다. 홍범도 장군은 1908년 부인과 장남을 항일의병투쟁 과정에서 잃었다. 그해 가을 열두 살의 둘째 아들 홍용환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넌 뒤 만주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떠났다. 망명한 지 113년, 1943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서거한 지 78년 만에 장군의 유해가 돌아오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친 행로홍범도 장군의 조국 강토를 향한 그리움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있다. 1920년 6월 초 봉오동전투가 임박했을 때다. 그는 봉오동 상촌의 어느 산 정상에 올라 고국을 바라보며 “아, 내가 몇 년 만에 고국산천을 보게 되는가”라는 긴 탄식을 하고 흐르는 눈물을 감췄다고 한다. 홍 장군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힘들게 살던 함경도 출신 농민들이 이 일화를 듣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했다.
『홍범도 일지』에 기록된 망명 이후 그의 행로를 추적하다 보면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다양한 지명이 등장한다. 홍 장군의 활동 영역이 광활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37년 10월 홍 장군은 자신이 속한 집단농장 주민들과 함께 카자흐스탄 아랄해 부근 얀쿠르간 지방 사나리크 촌소비에트로 강제 이주됐다.
5개월여 후인 1938년 4월 초 바람이 세고 척박한 벽촌에서 생활하는 홍 장군의 사정을 알게 된 크즐오르다 고려인 유지들이 뜻을 모아 그를 시내로 옮겨 살게 했다. 3개월간 병원 경비로 일하는 등 홍 장군의 도시 생활은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다. 연금(80루블)만으로는 궁색했던 그의 형편을 알게 된 고려극장 관계자들이 수직원(수위장) 자리를 만들어 주고, 월급(50루블)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고려극장이 1942년 우시토베로 이주하면서 그의 형편은 다시 곤궁해졌다고 한다.
1943년 가을 75세의 홍 장군은 몸이 편치 않아 자주 앓았다. 그는 몸소 기르던 돼지를 잡아 크즐오르다에 있는 가까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홍범도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어쩐지 몸이 좋지 않으니 이게 마지막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에게 한번 대접을 하고 싶었소”라고 말했다. 며칠 후 홍 장군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그가 하직 인사를 한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됐다.
중국 길림성 화룡시에 세워져 있는 청산리대첩비. 독립기념관 김도형 선생 제공사망 후 분묘 보수·이장 등 거쳐홍 장군이 사망했을 당시는 소련이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이기에 분묘는 그의 집 근처에 임시로 조성됐다. 전쟁이 끝나고 묘소는 크즐오르다시 중앙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크즐오르다시 소비에트는 홍범도가 거주하던 집 근처 거리 이름을 ‘홍범도 거리’로 명명할 것을 결정했다.
1951년 10월 25일에는 분묘 상태가 나빠진 것을 발견한 크즐오르다시 고려인 인사와 전우들이 레닌기치 신문사 주필 남해룡, 부주필 염사일 등과 협의해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으로는 홍 장군의 전우였던 박성태·심상원과 친우(親友) 전경팔, 항일투사 이인섭, 레닌기치 신문사 사원 이인 등이 선임됐다.
위원회는 크즐오르다시 주민과 레닌기치 신문사 사원들의 기부금, 근처 치일리 구역 선봉콜호즈 회원들의 성금을 모았다. 기부금은 시멘트로 된 분묘, 분묘를 둘러쌀 철장을 마련하고 철로 된 비를 세우는 데 사용됐으며 건립기념식도 개최했다.
당시 묘지에는 홍 장군의 반신 조각상을 세웠는데, 중앙공동묘지에서 유일한 동상이었다고 한다. 분묘 앞에 세운 철비 후면에는 “조선의 자유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홍범도의 일홈(이름)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1951년 10월 25일 레닌기치 신문사 동인, 고인의 전우 및 시내 유지한 조선인 일동 건립”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1981년 레닌기치 신문사 부주필을 지낸 김국천의 발기로 이듬해 4월 25일 묘지를 이장했다. 나무와 풀로 뒤덮여 있던 공동묘지 뒤편의 묘지는 기존보다 넓고 좋은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서거 40주년이었던 1983년에는 “장군의 위훈에 비추어 장군의 묘지가 너무 초라하다”는 의견에 따라 김국천을 회장으로 한 ‘홍범도 장군 추모비 건립추진회’가 조직돼 모금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부 고려인들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타지키스탄 주재 레닌기치 신문사 특파기자 정상진이 모금한 기부금으로 1984년 10월 25일에야 반신 청동상과 추모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
1996년 5월 20일에는 한국 정부와 기업이 제공한 기금으로 기존 흉상 주변에 3개의 기념비를 추가 건립했다. 기념비는 각각 1937년 강제 이주, 1995년 광복 50주년, 1997년 강제 이주 60주년이라는 역사적 시점에 맞춰 그에 부합하는 고려인들의 희망을 표현했다.
카자흐스탄에 설치돼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 사진=국방TV청동상·추모비들 남아 기념공원으로 유지홍 장군의 묘지는 고려인들은 물론 한국 등에서 온 방문객들이 참배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유해가 한국으로 이장되면 청동상과 추모비들이 남아 기념공원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한다.
1994년 10월 25일 ‘홍범도 장군 추모비’ 건립 10주년과 서거 51주기를 맞아 개최된 추도식을 계기로 고려인들 사이에서 홍 장군의 유해를 한반도로 이장하는 문제가 논의된 바 있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결론을 낸 이후 오늘에 이르렀다.
홍 장군의 유해 봉환 소식을 접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느 항일투사가 남겼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토록 고국 땅으로 돌아가고자 갈망했건만 끝내 이 몸뚱어리를 이 소금땅에 묻게 되는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나 먼 타국에서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간 수많은 독립군의 넋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이들 무명 민초의 한없는 존경과 절대적인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홍범도 장군이 어머니와 같은 고국의 따스한 품에서 영면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반 병 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홍범도 장군』 저자<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