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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봉오동 대첩 국민보고회 기념사 요지

여천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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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주년 봉오동 대첩 국민보고회 기념사 요지

1. 1920년 6월 7l일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전투는 청산리 전투와 함께 우리 민족의 무장 독립운동사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우리는 열세한 전력을 갖고도 용감하게 막강한 일본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의 동북부지역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이 끝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2.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문관우위와 무관천시의 왜곡된 양반 사상이 주류를 이루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승려나 농민들을 위시한 일반 민중이 봉기하여 문약한 관(官)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예가 많았다. 이런 의용(義勇)의 정신이 독립운동 전선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런 정신의 대표적 표상이 홍범도장군이 아닌가 생각된다.

3. 일전에 독립운동사에 많은 기여를 하고 계신 박도선생이 중국의 도문 지역을 답사하여 귀중한 사진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중국 도문시 인민정부가 1989년 1월18일 세운 <봉오골 반일 전적비>가 봉오동저수지 관리사무소 어귀에 말없이 세워져 있음을 알리는 사진들이었다. 이국 땅, 말없이 서있는 봉오동전적비를 보면서 착잡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위대한 홍범도장군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읽었다.

4. 오늘날 우리가 과거사를 재정립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작업을 함에 있어서 치욕의 역사뿐 아니라 민족을 위해 용감하게 싸운 피나는 역사도 동시에 재정립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특히 홍범도장군의 묘는 아직 카자크스탄의 공원묘지에 묻혀있다. 소련혁명 초기 레닌은 약소국의 민족해방투쟁을 격려하는 뜻에서 홍범도장군의 무장투쟁을 격려했으나 그 후 스탈린은 이를 배신했다. 이번에 우리 기념사업회의 장의균 상임이사께서 연해주 일대를 찾아 홍범도장군의 양손녀를 직접 찾았고 그를 통하여 홍범도장군의 위대한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1932년 나라가 없는 고려인들 가운데 지도급인사들은 일시에 3,000명이 학살되고 20만명이 중앙아시아를 쫓겨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간 참담한 역사의 이야기도 확인하고 왔다. 홍범도 장군도 중앙아시아에 같이 쫓겨 온 몸이지만 당시의 고려인들을 묶어서 협동조합운동도 하면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다시 살아가도록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는 증언도 들었다.


여천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이종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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