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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한국사 I 142 독립군 연합부대,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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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간도 출병 목적을 간파한 무장항일단체들은 보다 효과적인 대일항전을 벌이기 위해 각 단체의 지휘부를 통합하고 병력을 재편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부대인 서로군정서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세를 규합해 청산리로 모여들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과 10여 차례 걸쳐 격전을 치룬 청산리전투는 한인마을이 있던 백운평에서 시작됐다. 독립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독립군은 현대적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화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펼쳤다. 독립군이 보유한 600여 정의 소총과 6정의 기관총, 2문의 박격포 화력이 3면에서 일시에 일본군 머리 위로 쏟아졌다. 독립군은 무장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며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는 유격전을 펼쳤다. 20여 분의 교전 끝에 일본군 200여 명이 전사했다. 백운평전투의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독립군 연합부대는 추격전을 이어갔다. 청산리전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곳은 어랑촌이다. 어랑촌에 일본군 본대가 집결해 있다는 사실을 입수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곧바로 어랑촌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했다. 어랑촌전투에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최대 전력을 투입됐다.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이어진 싸움에서 일본군은 300여 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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