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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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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4건
영상한국사 I 155 소련의 고려인 정치탄압과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 1937년 히틀러는 군사력을 증강하며 사회주의 소련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괴뢰국가 만주국을 앞세운 일본도 소련을 턱 밑에서 위협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소련의 경계는 극에 달했다. 스탈린에게는 독일과 일본이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는 사태가 가장 큰 위협거리였고, 연해주에 있는 조선인, 고려인들이 일본 군국주의와 내통할 것을 의심했다. 이를 봉쇄하기 위해 1937년 9월, 고려인들에게 갑작스런 이주 명령이 떨어진다. 수확을 앞둔 벼를 그대로 둔 채,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시베리아를 횡단해야 했다. 무려 17만 2,000여 명의 고려인들이 한꺼번에 연해주에서 6천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것이다.
영상한국사 I 154 홍범도 등 고려인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다
- 러시아에 머물며 끝까지 독립투쟁을 모색하던 홍범도는 다른 동포들과 함께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겨울, 난방시설 하나 없는 기차 짐칸에 실려가야했던 고려인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도착한 사람들도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살아야만 했다. 강제이주 당시 홍범도의 나이는 70세였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 수위로 근무했다. 당시 고려인 극작가 태장춘은 홍범도의 생애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고, 태장춘의 권유로 홍범도가 작성한 메모가 홍범도 일지다. 1942년 중앙아시아 크즐오르다에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됐다. 이듬해인 1943년, 홍범도는 해방을 2년 앞두고 눈을 감았다.
영상한국사 I 153 홍범도 장군, 고려극장 창고지기로 쓸쓸한 노년을 보내다
-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홍범도 장군 묘에는 매년 장군의 기일이면 국내외의 뜻있는 사람들의 추모 발길이 모인다. 1868년 평안북도에서 출생한 홍범도 장군은 구한말에 의병을 일으킨 후 봉오동과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에도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벌인 그는 50만 고려인들이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고려인이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후 고려극장 창고지기로 쓸쓸한 노년을 보낸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 역시 조선의 적이라며 전선으로 보내 달라고 소련 정부에 간청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고려인들의 도움으로 노년을 보내던 홍범도 장군은 1943년에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홍범도 장군 외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진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들의 고귀한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는 정작 해방된 조국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렸다.
영상한국사 I 152 고려인 독립군 영웅들의 항일투쟁
- 1892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한창걸은 연해주 무장독립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차세계대전에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던 그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제대하고 연해주로 돌아와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었다. 곧이어 일본군이 연해주를 침략하자 독립군을 조직했다. 1921년 말 일본군은 러시아 반혁명군과 함께 총공세를 펴며 하바롭스크로 북진했다.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의 공세에 밀리던 고려인 독립군인 대한의용군 2중대가 달레네첸스크역에서 러시아 반혁명군 1,500명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백병전 끝에 대한의용군은 중대장 한운용을 포함, 대부분 전사했다. 연해주 곳곳에서 고려인 부대는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과 싸웠다. 1922년 2월의 볼로차예프카전투는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을 몰아내는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대한의용군은 큰 공을 세웠다. 철조망과 기관총에 진격이 막히자 절단기가 없던 고려인 전사들은 몸을 던져 철조망을 끊고, 온몸으로 기관총알을 받아냈다. 최계립, 임표, 니꼴라이 김 등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전투는 승리하였고, 고려인 부대의 용맹성을 한껏 드높였다.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은 1919년 17개 부대에서 1921년에는 36개로 늘었다. 그 수는 4~5천 명에 달했다. 1922년 10월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수할 때까지 최선두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은 고려인 독립군이었다.
영상한국사 I 151 연해주 독립군부대의 올가항전투와 이만전투
- 1921년 11월, 러시아 연해주 올가항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 그리고 소비에트혁명군과 한인독립군이 격돌한 것이다. 당시 신용걸은 올가항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저지시키라는 김경천의 명령을 받고 3개 소대를 이끌고 갔다. 소수의 한인빨치산과 소비에트혁명군은 함포를 쏘며 상륙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을 상대로 3일간 격전을 벌이며 버텨낸다. 기어이 일본군을 물리쳤지만, 한인 독립군도 전사자가 22명이나 됐다. 중대장 신용걸의 최후는 비장했다. 부하 20여 명이 죽자 부하를 죽이고 살 수 없다며 배를 갈라 자살했다. 1921년 겨울, 김경천과 대원들은 이만전투를 위해 연해주의 눈밭을 헤치며 북진하고 있었다. 이만은 김경천이 머물던 빨치산스크에서 500km 거리였다. 한겨울에 도보로 그 거리를 이동하면서 전투를 치렀다. 1922년 1월 6일, 김경천 부대는 이만을 지나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던 일본과 러시아 백군의 허리를 끊는 공격을 감행했다. 불과 200여 명의 부대원으로 700여 명의 연합군과 맞서 싸워 승리함으로써 김경천은 러시아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영상한국사 I 150 일본육사출신 김경천과 신흥무관학교
- 김경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3.1운동 이후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후 만주 항일독립운동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후 러시아로 이동해 항일무력투쟁을 조직하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며 전설적인 영웅이 됐다. 김경천을 비롯한 많은 애국청년들이 무력항쟁을 통한 독립 쟁취의 뜻을 품고 목숨을 건 망명을 선택했다. 그들의 목표는 단기간 내 군사 인재를 양성하고, 군사력을 강화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들 무장투쟁의 씨앗이 된 곳이다. 1920년 청산리전투 대승 이후 1940년 광복군 창설까지 항일 무장독립전쟁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도했다.
영상한국사 I 149 자유시참변, 항일무장독립운동사의 비극
- 1920년 경신대학살(경신참변/간도참변)이 벌어졌다. 청산리전투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만주 일대 민간인을 무차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간도참변이 일어나자 독립군들은 안전을 위해 러시아 자유시로 가게 된다. 러시아는 처음에는 항일투쟁을 보장했으나 일본의 개입으로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무장해제를 둘러싼 이견이 독립군 사이의 내분과 갈등을 낳았고, 무력충돌까지 발생했다. 홍범도장군 등이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념적 대립과 현실에 대한 인식 차이가 결국 참극으로 이어지게 됐다. 1921년 6월 러시아 자유시에서 러시아 적군이 독립군들을 포위하고 사살하는 자유시참변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만주, 연해주 지역 독립군 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다. 항일무장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었다.
영상한국사 I 148 간도에서 벌어진 일제의 참혹한 만행
- 나카노는 만주지역 조선인을 불령선인으로 몰아 탄압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고 독립군과 조선 양민의 대대적인 학살 작전을 전개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독가스까지 지원받으며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고 집단 학살했다. 1920년 10월 30일에는 길림성 용정의 마을에서 일본군에 의해 33명이 한 번에 몰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일본 경찰들은 마을의 청장년을 교회당 안에 몰아넣고,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 가족들에게 묻은 시신을 파서 다시 가져오라고 한 뒤, 시신을 모아놓고 또다시 불살랐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 유족들은 시체를 가릴 수 없어 33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었다. 그 후, 마을 어귀에 일제의 경신년 대토벌의 죄상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경신참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이 만주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비극적인 참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