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 範 圖
홍범도자료실
영상자료
총 94건
영상한국사 I 147 훈춘사건, 간도 출병을 위한 일본의 자작극
- 1920년 10월 2일, 400여 명의 마적들이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급습했다. 마적들은 영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과 조선인 17명을 살해했다. 이것이 이른바 훈춘사건이다. 간도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제가 벌인 자작극으로 마적들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다. 이미 독립군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간도출병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일제는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로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했다. 일본군은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불과 두 달 동안 3,600여 명의 한인들이 피살되고, 민가 3,500여 채, 학교 60개가 불탔다. 명동학교는 일본군이 가장 먼저 노린 공격 대상이었다. 처음부터 명동학교를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지목하고 대대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학교를 샅샅이 뒤진 끝에 조선과 일본의 영토를 분리 표시한 지도와 태극기를 찾아내 트집을 잡았다. 명동학교는 일본군의 손에 소각됐다. 간도 이주 한인들이 독립의 꿈을 키우며 가꾸었던 학교는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영상한국사 I 146 독립군, 체코군단의 무기를 구입하다
- 무기부족에 시달리던 연해주 독립군들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체코군단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구입했다. 자금은 한푼 두푼 동포들이 모은 성금이었다.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고전하던 독립군에게 체코군단의 무기는 구세주였다. 1920년 10월 21일.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과 청산리 일대에서 대승을 거둔다. 독립전쟁사에 길이 빛날 청산리전투 대승의 이면에는 체코군단의 무기가 있었다.
영상한국사 I 145 산포수부대, 청산리전투에서 맹활약하다
- 고종은 1902년 이범윤을 간도 조선인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간도관리사로 임명했다. 일본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은 마적떼의 약탈과 청 관리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범윤은 산포수 2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사포대를 결성했다. 사포대는 한일병탄 후 연해주에서 무장 항쟁을 계속했다. 이범윤과 홍범도의 산포수 부대의 활약은 조선인에게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됐다. 유학자로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병준 또한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산포수와 유림, 의병을 규합해, 대한독립단을 결성한다. 산포수가 주축이 된 독립군은 이범윤의 사포대를 시작으로 조병준의 대한독립단,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까지 그 맥을 이어갔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청산리전투는 특히나 산포수 부대의 활약이 돋보인 전투였다.
영상한국사 I 144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주역,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 199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대승의 주역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일지가 알려졌다. 일제는 홍범도의 처와 아들을 잡아, 홍범도의 행방을 물으며 고문했다. 홍범도 장군은 정평전투에서 중대장이자 아들인 양순을 잃었다. 다른 아들과 아내마저 독립투쟁으로 잃어야했다. 홍범도 또한 꿈에 그리던 해방을 불과 2년 남기고 타국 땅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영상한국사 I 143 김좌진과 홍범도 장군이 함께 싸운 청산리전투
- 일본의 대대적인 독립군 섬멸 작전이 시작되자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 여러 독립군 부대는 일전을 위해 청산리로 모였다. 이들은 지휘부를 통합하고 군대를 재편성하며 긴밀히 연합했다. 독립군들은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유격전을 펼쳤다. 어랑촌은 청산리전투 가운데 가장 큰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920년 10월 22일, 홍범도는 어랑촌에서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에게 포위돼 혈전을 치른다는 보고를 받고, 김좌진 부대를 돕기 위해 일본군을 급습했다. 독립군 연합부대는 300여 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내며 어랑촌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이후에도 백운평, 완루구, 천수평, 천보산 등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항일무장투쟁 역사상 가장 빛나는 성과를 거뒀다.
영상한국사 I 142 독립군 연합부대,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다
- 일제의 간도 출병 목적을 간파한 무장항일단체들은 보다 효과적인 대일항전을 벌이기 위해 각 단체의 지휘부를 통합하고 병력을 재편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부대인 서로군정서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세를 규합해 청산리로 모여들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과 10여 차례 걸쳐 격전을 치룬 청산리전투는 한인마을이 있던 백운평에서 시작됐다. 독립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독립군은 현대적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화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펼쳤다. 독립군이 보유한 600여 정의 소총과 6정의 기관총, 2문의 박격포 화력이 3면에서 일시에 일본군 머리 위로 쏟아졌다. 독립군은 무장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며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는 유격전을 펼쳤다. 20여 분의 교전 끝에 일본군 200여 명이 전사했다. 백운평전투의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독립군 연합부대는 추격전을 이어갔다. 청산리전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곳은 어랑촌이다. 어랑촌에 일본군 본대가 집결해 있다는 사실을 입수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곧바로 어랑촌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했다. 어랑촌전투에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최대 전력을 투입됐다.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이어진 싸움에서 일본군은 300여 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영상한국사 I 141 독립군가,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리다
-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히 전개됐던 시기, 비록 독립군 진영마다 박자, 곡조, 가사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독립군가가 많이 불렸다. 1900년대는 동포, 독립, 애국이라는 단어가 가사에 많이 등장했고, 1910년대에는 청년, 자유, 원수, 동포, 독립, 2천만, 대한국 등의 단어가 사용됐다. 광복 후 독립군가는 서서히 잊혔다. 광복군 출신 박노일씨는 독립군가를 되살리는 일에 앞장섰다. 여섯 곡이 실린 최초의 독립군가 앨범을 낸 뒤 세상을 떠나자 아내 곽영숙씨가 그 뜻을 이었다. 여사는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군들의 희생이 노래로 후대까지 전해지길 바라며 사라진 독립군가를 찾아 반평생을 바쳤다. 그는 독립군들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그들이 기억하는 독립군가를 녹음해 악보로 옮겼다. 이런 노력으로 독립군가 96곡, 항일민족의 노래 96곡을 발굴했다. 지난 2005년에는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독립군가가 실리는 뜻깊은 일이 일어났다.
영상한국사 I 140 머슴출신 산포수 의병장 홍범도의 봉기
- 홍범도는 1868년 8월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살에 고아가 돼 머슴살이를 한 그는 결혼 후에는 함경도 북청에서 산포수로 생활했다. 홍범도는 리더십을 갖춘 명포수였다. 그는 포계(산포수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조직)의 대장으로 추대됐고, 동료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썼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이후, 홍범도는 꾸준히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당시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부대는 연전연승했다. 지형에 익숙하고 뛰어난 기동력을 가져 유격전을 전개하는 데 유리했다. 홍범도는 말단 병사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대장이었다. 사령관의 군복과 말단 병사의 군복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날으는 장군, 비장군 등으로 불린 그의 명성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자자했다. 홍범도를 찬양하고 응원하는 '나는 홍범도'라는 노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