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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는 좁은 개념으로 보면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이 지휘한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칩입한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산전연대(山田聯隊)를 크게 격파한 전투로 한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청산리전투라 할 때에는 대한군정서는 물론 이도구 어랑촌 부근의 산림지대에 집결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연합부대(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대한국민군·훈춘한민회·의민단·대한신민당 등)가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完樓溝)·어랑촌(漁郞村)·천수평(泉水坪)·고동하(古洞河) 등 2, 3도구 서북편의 밀림장곡에서 전개한 대소 10여 회의 승첩을 통칭하여 의미한다.

일제의 간도 침략군 가운데 청산리 일대에 침범한 동지대는 용정과 무산 방면에 진출하여 천보산(天寶山)에 주력을 두고 있었으며, 그 산전연대의 주력부대는 20일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오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사령관은 그들과 대전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한 골짜기마다 독립군을 전투편제로 이중 매복시켜 놓은 뒤 일본군을 현장으로 유인하였다.
독립군이 매복한 계곡은 청산리 골짜기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는 백운평이라 부르는 공지가 있어 청산리계곡을 통과하려면 단 하나의 오솔길인 그 공지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안천(安川)소좌 인솔 하의 산전연대의 전위 부대는 독립군 매복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한채 21일 아침 8시경 백운평을 침입하기 시작하여 1시간 만인 상오 9시경에는 그 곳을 점령하다시피 하였다. 일본군이 최전선의 독립군 매복지점으로부터 불과 10여 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바싹 근접하였을 때, 김좌진 사령관의 공격 명령과 함께 600여 명의 독립군은 일본군이 다다른 중앙의 공지를 일시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협공을 받은 안천 전위부대는 독립군의 공격에 대한 응전을 시도하였으나 매복장소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전열이 곧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독립군은 30여분 동안의 집중 공격으로 200여 명의 전위부대 전원을 섬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안천(安川)전위부대의 전멸에 뒤이어 백운평 방면으로 뒤따르던 山田 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산포(山砲) 등의 중무기를 앞세우고 백운평 교전지를 향하여 돌격해 왔다. 그러나 주력부대 역시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던 독립군의 집중공격에 수많은 사상자만 나오게 되자 보병과 기병으로 몇 개의 중대를 편성하고 독립군을 협공하기 위해 고지를 따라 돌격하면서 우회하였으나 절벽 위에서 사격하는 독립군의 화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부대를 약간 후퇴시켜 전열을 재정비한 뒤 산포와 기관총의 엄호하에 정면과 측면에서 최후의 돌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고지 위, 완전히 은폐된 지점에서의 이들을 향한 독립군의 집중사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산전(山田) 본대는 끝내 백운평에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본영을 향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결국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완루구 전투

청산리대첩 가운데 백운평 전투에 이어 10월 22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루구에서 동지대의 주력을 맞아 대승한 전투다.

 
천수평 전투

백운평 전투를 치른 직후 밤새 행군을 재촉하였던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튿날(22일) 새벽 2시 30분경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에 이르렀을 때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인근의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에 다시 강행군을 재촉하여 연성대를 앞세우고 1시간 가량을 행군한 끝에 천수평에 당도하였다. 이 곳에는 일본군 1개 중대 120여 명의 기병이 독립군이 접근해 온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독립군은 이들을 완전히 포위한 채 5시 30분경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깊은 수면 중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허둥대기만 하다가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몰사하였다. 이에 비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17명에 불과했다.

 
어랑촌 전투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전투가 어랑촌 전투이다. 어랑촌은 1910년 국망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의 주민이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골짜기 안에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인데 이 마을을 중심으로 10월 22일 아침부터 독립군 2,000여 명과 일본군 5,000여 명간의 격전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모든 면에서 월등히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항일의지로 무장한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뛰어난 전술로 이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 전투의 전과와 의의

청산리전투의 총체적인 전과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군 전사자는 연대장 1명·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1,254명, 부상자는 200여 명, 독립군측은 전사 1명·부상 2명·포로 2명이라고 한다.

독립군은 우선 정신적 측면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굶주림을 견딜 뿐만 아니라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항전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 전술적 측면에서 볼 때 독립군이 사격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여 일본군에게 정확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일본군은 삼림과 계곡 등의 지형과 지세를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자상전(自相戰)까지 벌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군은 지휘관의 작전 수립·지휘 능력면에서 일본군을 능가했다.

그 동안 독립군을 양성해 온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국내진입작전이 개시된 1919년 여름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군의 항전에 뒷바라지를 해 왔다. 대개가 개척농민으로 형성된 한인사회는 아직 경제적으로 생활기반조차 확고하지 못한 형편에서 군자금을 내어 무기와 여러 가지 군수물자를 마련케 하였고, 독립군의 식량·피복 등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일제 토벌군의 동태를 광범하고 정확하게 탐지하는 정보활동은 물론 독립군의 각종 통신연락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지형·지세를 적절히 이용해야 하는 독립군의 행군이나 전투시에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