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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노령 연해주로 옮아간 홍범도 일행은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노동회(勞 會)'를 조직하고 시베리아철도부설공사 등 각종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무장항일투쟁의 적기(適期)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거족적인 항일기운이 일게 되자, 홍범도장군은 즉각 독립군 조직에 착수, 그해 3∼6월 사이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기에 이르렀고 그리고 그해 8월에는 간도의 백두산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은 간도로 근거지를 옮긴 직후인 8월에 독립운동자들의 숙원이던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해 두만강을 건너와 혜산진(惠山鎭)의 일군수비대를 습격, 이들을 섬멸시켰고 이것은 3·1운동 후 전개된 최초의 국내진입작전으로, 이후 왕성하게 펼쳐지는 독립군 항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10월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에 진입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자성(慈城)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여 일군 70여 명을 살상시키는 전과를 올렸고이듬해(1920) 봄이 되자,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은 대규모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산된 독립군단을 하나로 통합, 군력을 집중시키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홍범도는 군단 통합에 착수, 우선 대한국민회의 국민군과 대한독립군을 통합하였다.

간민회(墾民會)의 자치와 전통을 계승, 간도에서 결성된 대한국민회는 3·1운동 이후 간도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항일단체로 부상하면서 군무위원 안무(安武)를 지휘관으로 하는 국민군을 편성하였던 것으로 이를 홍범도장군의 주장에 따라 대한독립군과 통합한 것이다.
그 통합된 군단의 행정과 재정은 국민회가 관장했으며, 군무는 대한독립군을 홍범도장군이, 국민군을 안무가 담임하여 지휘토록 하고, 군사작전을 전개할 때에는 홍범도장군이 두 군단을 '정일제일군사령관'(征日第一軍司令官)이란 이름으로 통수케 하였고 이어 정일제일군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의 군사통일도 이룩하였다.

결국 홍범도장군 등의 군사통일 노력에 의하여 1920년 5월 28일에는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조직하고 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무렵 대한군의 병력은 군무도독부계가 약 6백 70명, 홍범도장군과 안무계를 합하여 약 5백 50명, 도합 1천 2백여 명으로 추산된다.

통합된 독립군단은 1920년 6월 7일에, 청산리승첩과 더불어 독립군항전사에 영원히 기록될 봉오동 승첩을 거두게 된다.봉오동승첩은 그 전단이 독립군이 수행하던 통상적 국내진입작전에서 비롯되었다. 6월 4일 새벽 30여명으로 구성된 일단의 독립군 소부대가 종성(鍾城) 북방 5리 지점의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 일제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한 뒤 날이 저물어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고 일제 이 패배를 설욕코자, 남양수비대 소속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하여금 독립군을 추격케 하였으나, 도리어 이들은 삼둔자(三屯子)에 이르러 독립군의 반격으로 전멸되고 말았다. 이것이 봉오동 승첩의 서전에 해당하는 삼둔자전투이다.

일제는 삼둔자전투의 대패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함남 나남(羅南)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군 19사단은 즉시 안천(安川)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 북간도에 진입, 독립군을 공격케 하였다.
그들은 미리 상부로부터 시달받은 작전명령에 따라 안산(安山) 방면을 거쳐 고려령(高麗嶺)을 향해 곧바로 봉오동 입구로 진입하여 왔다.

홍범도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군 추격대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만반의 요격계획을 세워 포위망을 쳐놓고 이들의 진입을 기다렸다.홍범도장군의 부대는 봉오동의 주민을 모두 대피시킨 뒤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 배치하여 일군 추격대를 유인, 포위하여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워 놓았던 것인데이와 같은 독립군의 매복상황을 알지 못한 채, 일군 추격대는, 이화일(李化日)이 이끄는 독립군 유인부대와 접전을 벌인 뒤, 7일 오후 1시경 완전히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홍범도장군은 일제사격의 신호탄을 발사하였다. 미리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이를 신호로 삼아 삼면고지에서 일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고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군은 신곡(神谷) 중대와 중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결사적인 돌격을 시도하는 한편 기관총대로 하여금 응전토록 하였으나, 지형적 우세를 점한 채 퍼붓는 독립군의 일제공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이러한 포위망 속에서 3시간 동안 필사적인 저항을 하던 일군 추격대는 사상자가 속출함에 따라 더 이상 응전치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는 부하들을 독려하여 퇴각하는 일군을 맹렬히 추격, 다시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립군 본영을 일거에 분탕하려던 일제의 월강추격대대는 봉오골에다 엄청난 전사자만 남겨 놓은 채 동남방의 비파동(琵琶洞)을 거쳐 유원진(柔遠鎭)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이것이 봉오동승첩의 경과이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승첩에서 올린 전과는 일군 사살 1백 57명, 중상 2백여 명, 경상 1백여 명에 달하였다.홍범도장군이 지휘한 봉오동승첩은 독립군들 뿐만 아니라 전독립 운동자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켜 놓았으며 독립군들은 이러한 봉오동 승첩을 10년 이래의 숙원인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부르면서 계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홍범도장군은 봉오동승첩을 거둔 뒤 군무도독부를 떠나 약 3백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일제가 간도지역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가해옴에 미쳐 여러 한국독립군단은 1920년 8월부터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장정(長征)을 떠나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이 거느리는 대한독립군단이 제일 먼저 근거지 이동을 개시해 안도현(安圖縣) 방면의 백두산 기슭을 향하였고, 뒤이어 국민회군, 의군부(義軍府) 등의 독립군단도 이도구(二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삼도구(三道溝)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국민회의 지원을 받아가며 군사통일에 주력하는 한편, 간도 일대의 지리를 연구하며 독립군의 전력을 강화시켜 장차 있을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한편, 일제는 이 무렵 봉오동에서의 참패를 설욕코자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 鮮人剿討計劃)이라는 대규모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워 놓고, 1920년 10월 2일 소위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일군의 간도 출병 구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일군은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천여명의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 10월 7일부터 간도를 침입, 독립군 '섬멸'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의 병력인 19사단의 동지대(東支隊)가 인솔하는 5천여명의 일군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주둔한 이도구(二道溝)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주둔한 삼도구(三道溝)로 진격해 들어 왔다.

그리하여 독립군과 일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청산리전투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첩을 기록한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이 지휘한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지휘한 대한독립군, 국민회의 국민군 등의 연합독립군이 1920년 10월, 두만강 상류의 북쪽으로 40∼50km 지점에서 위치한 화룡현 삼도구와 이도구 서북방의 청산리, 어랑촌, 봉밀구 등지에서 간도를 침입한 일제의 독립군 '토벌군'과 대회전을 벌인 것이다.

청산리승첩은 백운평(白雲坪)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完樓溝), 천수평(泉水坪), 어랑촌(漁郞村), 맹개골, 만기구(萬麒溝), 쉬구, 천보산(天寶山), 고동하곡(古洞河谷) 전투 등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6일동안 벌어졌던 일련의 독립군항전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작전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 일련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실로 막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 일군 장병 1천 2백여명을 사살했고, 200여명을 전상(戰傷)시켰으며, 기타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이로써 일군은 독립군을 '초토'하려던 당초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후 그들은 무고한 한인양민들을 대상으로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통칭되는 잔인한 보복살육행위를 자행하게 된다.

봉오동, 청산리승첩을 이룩한 뒤 홍범도장군은 부하들을 이끌고 북상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밀산(密山)을 거쳐 1921년 1월초에는 우수리강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들어갔다.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외에도 북로군정서,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군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독립군단들이 이곳으로 집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대소 독립군단의 대표들이 회동하여 독립군 대회를 열고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게 된다. 그 총재에는 서일(徐一)이 올랐으며, 홍범도장군은 부총재가 되어 군사작전을 실제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만으로 들어간 이 대한독립군단은 그후 다시 북정을 개시, 알렉세호스크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자유시 참변과 항일 독립운동침체 홍범도장군의 만년

그러나, 그해 6월 한국무장독립투쟁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인 자유시사변이 발생하게 되어 대한독립군단의 항일전 재개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홍범도장군은 이르크츠크에 있던 코민데른 동양비서부의 독립군 집단이주 정책으로 말미암아 8월 5일 이르크츠크로 이송되었고 그 후 그는 민족해방유격대의 원로로서 예우만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22년 1월 2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 상당한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었고그뒤 홍범도장군은 1922년 전반기에 다시 이만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브라고웨시첸스크[자유시, 흑하(黑河)]에서 이동휘(李東輝),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고 9월 1일에는 치타에서 그 대표자회의를 여는 등 한인사회의 자치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7년에 홍범도장군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다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그는 최후의 귀착지가 된 현재의 카자크공화국의 크즐-오르다 지방에 정착, 집단농장에서 만년을 외로이 보내다가 1943년 75세로 작고해 그곳 공동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를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