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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소련 원동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그의 홍범도일지에 의하면 1868년 8월 27로 명기되어있으며 그의 출생지 또한 일지에 의하면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홍범도장군의 본관이 남양 홍씨로 남양 지금의 경기도수원과 화성일 때의 옛 지명이었고, 여천(汝千)이라는 호는 뒷날 의병장이 되어서야 가지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홉살 때 아버지마저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다. 그후. 15세까지 머슴을 살았으며1883년 나이 두살을 올려 평양 1883년부터 1887년까지 보병 부대에서 나팔수로 복무하였으나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한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영하였으며 이때의 군영생활은 이후 그가 무장 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어서 전술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1887년부터 1890년까지 황해도 수안 지방 부근의 총평 동네 종이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이곳에서도 임금문제로 사주와 싸운 다음 금강산에 있는 신계사로 들어가 1890년부터 1892년에 신계사(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에서 지담대사 상좌로 수행하면서 간단한 한자나 한글을 깨우쳤으며 이때 지담 대사( 이순신장군의 후손)를 통해 항일의식을 전수 받았을 것으로 추정 된다.
홍범도장군은 얼마 동안 전전한 끝에 함남 단천으로 가서 금을 캐는 광산의 노동자로 2년간 일하고 그곳에서 삼수 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93년경에 다시 삼수로 이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출중한 사격술이 인정되어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을 하였고 얼마 뒤 다시 북청으로 이거, 그곳의 산포수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에 가입,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포연대장(捕捐 大將)에 뽑혔다.

이는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를 납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그는 1907년 의병항전을 개시할 때까지 14년 동안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홍범도장군이 의병 활동을 시작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07년 9월 3일 일제가 공포한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의 졸속한 시행에 있었다. '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는 법령은 군대해산에 뒤이어 모든 한 국민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무력저항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홍범도장군은 안산사포계의 동료들과 함께 일제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즉각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장군의 인솔하에 약 70여명의 산포수들은 머리에 혁관(革冠)을 쓰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安坪社) 엄방동(嚴方洞)에서 회집하여 항일 의병전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그 이튿날 거사의 성공을 비는 혈제(血祭)를 지내고, 일진회 회원으로 친일파인 안산(安山)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총살하고, 계속해서 인근의 부일배들을 소탕하였고 이로써 홍범도장군은 항일독립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후 일생 동안 항일무력전선에 온갖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70여명의 산포수를 근간으로 봉기한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화전민, 토막민(土幕民) 등의 의병지원자를 받아들여 이듬해에는 1천여 명에 달하는 대 부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거의 초기에 7지대로 나뉘어 십장제(什長制)로 편제되어 있던 의병부대를 이때에 와서는 구한국군의 편제를 모방해서 개편하였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장군의 의병들은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매복하였다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무기를 회수해 가던 일군 무기수송대을 섬멸시켜 버렸다. 이를 이어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갑산으로부터 북청으로 향하던 우편마차 호위 일군을 공격, 전멸시켰으며 그 다음 날에도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후치령에 잠복,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향하던 일군들을 전멸시키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들의 잇다른 승리에 놀란 일군 북청수비대는 궁부(宮部) 대위의 지휘하에 2개 소대 52명을 후치령으로 급파, 홍범도장군의 의병을 공격케 하였다.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이를 알고 11월 25일 후치령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역시 유리한 지형에서 유격전으로 이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후치령 전투를 시발로 홍범도 의병부대는 삼수, 갑산, 북청 등지에서 험산준령을 타며 유격전을 펼쳐 이들을 추격해 오는 일군토벌대를 맞아 연전연승을 거두어 점차 그 명성을 더해 갔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의병수뇌부가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 수난을 겪게 되었고홍범도장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 태양욱 양인은 '귀순'을 원하던 2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1908년 3월 17일 일군에게 '귀순'해 버렸으나 일군들은 무장해제 유예기간 1개월의 약조를 지키기는커녕 '귀순'의병들을 즉각 무장해제시켜 버렸고 이에 저항하던 태양욱은 총살되었고, 차도선 등은 홍범도를 유인할 목적에서 피체, 투옥되었습니다.

이들의 '귀순'은 의병부대의 전력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와 항일전 수행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 무렵 일제는 홍범도장군을 위협,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용범(龍範) 등 가족을 구류시켜 인질로 삼는 비열하고도 잔인한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구국대의를 위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에 바빴고 결국 그의 가족(부인과 큰아들)은 끝내 일군에게 희생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후 불굴의 투지로 의병부대의 재편성에 착수한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삼수, 갑산, 무산, 북청 일대를 몸소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입하지 않은 산포수들과 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그 결과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재편되어 1908년 4월 말에는 5백여명, 다시 5월 중순에는 650여 명에 달해 새로운 항일전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의병항전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같은해 12월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삼수, 갑산, 장진(長津), 북청 등지를 오가며 각처에서 일군과 조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일진회 회원 등을 비롯한 부일주구들을 처단, 민족반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홍범도장군은 한반도 북부지방의 의병항일전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열렬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때 당시 함경도 북부지방에서 그의 의병부대의 항일전을 찬미하며 불리던 노래가
“날으는 홍범도가“이다.

이처럼 홍범도장군이 도처에서 일군들을 격파하며 의기(意氣)를 드높히자, 일제는 크게 당황해 일군 동부 및 북부수비관구 전 병력을 동원하여 6, 7월 2개월을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 '대토벌' 기간으로 정해 놓고 홍범도 의병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홍범도장군은 신속한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벌여 이들의 예봉을 피해가며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홍범도 의병부대는 전력이 점차 소모 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가 1907년 11월 15일 봉기 이후 탄약 고갈로 고통을 받던 1908년 9월까지 일군과 약 37회의 대소 회전을 치뤘다고 한다.

홍범도장군이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일방,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 및 남한의 의병부대와도 연락을 취해 대규모 의병항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하는 의병이 국내진입작전에서 일군에 패한 뒤 연해주의 의병항전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의병규합노력은 여건상 불리한 형편이었고 결국홍범도장군은 1910년 3월 마침내 일단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간도의 장백현(長白縣)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1913년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고이로써 홍범도장군의 의병항전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