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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기고-이종찬 이사장
  관리자   201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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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2013.6.6] 기고

봉오동 대첩을 國軍의 역사로 재조명하자


1920년 6월 7일은 우리 독립군이 '봉오동 대첩'에서 승리하여 무장독립투쟁사의 새로운 전기를 이룩한 날이다. 이날 중국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최진동·안무 등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 제19사단 부대와 전투를 벌여 수백명을 사살하는 등 크게 승리했다. 봉오동 전승(戰勝)은 여러 독립군 부대원 약 900명을 모아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통합부대로 편성하여 거둔 것이었다. 당시 지역별로 독립군이 조직되어 저마다 지휘권을 둘러싸고 마찰이 빈번하였다. 홍범도는 자신을 낮추고, 사령관 되기를 사양하며 일선 연대장으로 실병(實兵)을 지휘했다. 그의 겸손한 리더십으로 대원들은 단결했고, 적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무장투쟁이란 대부분 빨치산식의 소부대로 일본의 일선기관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린 수준이었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 정규사단 부대가 진격해 온 기회를 포착하여 적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봉오동 전투가 있음으로써 독립군은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재차 일본 정규군과 격전을 벌여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런 전승 기록은 곧장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되었고, 독립신문은 이를 크게 보도하여 국내외 항일세력의 사기를 드높였다. 이렇게 보고계통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독립군은 임시정부의 지도하에 항일투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과 우연하게 이루어진 조우전(遭遇戰)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군무부(軍務部)와 독립군 지휘부가 계획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의 역사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는 날 의병투쟁이 일어났고, 그 후 독립군이 의병투쟁을 계승하였으며, 그 전통을 이어받아 광복군이 투쟁을 개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국군의 역사도 그 연장선에 자리매김해야 단절 없는 올바른 역사가 될 것이고, 국군의 정신 전력도 강화될 것이다.

북한은 그들의 조선인민군이 1948년 2월 15일 창설되었다고 하여 왔다. 그러나 1978년에 이르러 김일성이 빨치산 투쟁을 시작했다는 1932년 4월 15일을 인민군 창건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무장투쟁의 역사를 선점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우리 국군의 역사는 아직도 1946년 미군정에 의하여 설립된 조선경비대를 우리 군(軍)의 기원인 양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2012.6.5. 23"00)

북한은 3대 세습, 파탄 직전의 경제, 인권탄압으로 얼룩져 있음에도 북한을 맹종하는 주사파가 왜 아직도 존재할까? 그 연원은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됐다. 암울했던 항일시대에 마치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만 존재했던 것처럼 우리의 무장투쟁을 매몰시킨 왜곡된 역사를 자라나는 세대들이 배우면서 열등감을 갖게 된 것이 근본 원인이다.

하지만 북한은 허상에 빠져 봉오동 대첩 같은 위업은 홀대하면서 김일성 우상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앞으로 진실한 무장독립투쟁사가 정리된다면 그들의 과장이나 날조는 금세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봉오동 전승의 기록을 우리 국군의 역사로 복원하는 작업이야말로 진정한 통일시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세우는 길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우리 헌법 전문(前文)에 명시된 바와 같이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정신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종찬(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