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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과 일제가 남긴 역사서적들
  김진규   201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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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제는 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은 남겼나?

김부식 (金富軾.1075-1151)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철저하게 당唐나라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삼국사기 서술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我唐太宗(우리 당태종)”이라고 칭하였다.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永輝)’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조선은 개국 초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자치통감 강목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사서들은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하였다.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정신은 사대사관의 전통이 되어 오늘날 우리 역사의 올바른 인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한국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바로 이 책을 얼씨구나 하고 악용하여 소위 반도사관, 식민사관, 왜식사관을 날조해 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 사관에 따라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승려 일연 (一然, 1206~1289)은《삼국유사三國遺事》<고조선기古朝鮮記>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 옆에 써 붙인 주석에“위제석야謂帝釋也(불교의 제석을 이른다)”라고 임의로 설명을 붙여 환인천제桓仁天帝가 세운 나라인 환국桓國을 불교의 신, 환인桓因의 왕국과 동일시 하였다. 제석帝釋은 인드라Indra라는 인도 신령을 일컫는다. 제석환인帝釋桓因Sakra-Devanam Indra을 줄여서 제석帝釋 또는 환인桓因이라 부른다. 그런데 환국桓國을 세운 천제天帝가 곧 환인桓仁이다. 비록 ‘인仁’ 자의 한자 표현이 다른지만, 환인천제桓仁天帝를 불교의 신, 환인桓因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일본이 조선의 뿌리 역사를 제거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왜곡에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 바로 이마니시 류(금서룡)이다. <조선사> 편찬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이마니시 류는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일제는 강탈한 조선사 문헌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끝에 조선의 시원 역사를 말살 할 결정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쓴 <조선고사의 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삼국유사]<고조선기古朝鮮記>의 석유환국昔有桓國 옆에 써 붙인 주석, “위제석야謂帝釋也”에 있었다.

[삼국유사]<고조선기古朝鮮記>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뜯어고친 것이다. 이로써 ‘옛적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인류 창세사의 건국 이야기를 ‘옛적에 환인桓因이 있었다’는 한낱 신화의 인물사로 바꾸어 버렸다. 국國을 인因으로, 글자 하나를 변조함으로써 한민족 상고사의 첫 번째 나라인 환국桓國을 통째로 지워버린 것이다.

이마니시 류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국國 자를 因자로 바꿈으로써 환국桓國에서 뻗어나간 배달국과 고조선의 건국자도 허구의 인물로 부정되어 버렸다. 한민족의 7천 년 상고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혀 버린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위제석야謂帝釋也(불교의 제석을 이른다)”라는 잘못된 주석에 의존하여 환국桓國을 신화의 역사로 부정한 것에 대해 이마니시 류는 ‘자신은 일연(一然,1206-1289)의 기록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일연을 내세워 자신의 한민족 시원 역사 부정에 대한 알리바이를 세운 그는, 1926년에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 새겨진 [삼국유사三國遺事]<경도제대 영인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들과 한목소리를 내는 이땅의 식민사학자들

일본인들은 1922년 12월 달에 ‘조선사편수회’ 즉,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1938년까지 본문만 35권이 되는『조선사(朝鮮史)』를 일본인들이 만든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이병도는 今西龍(이마니시류)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된다.

이병도의 화려한 약력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을 지냈고, 34년 진단학회(震 檀學會) 창립에 참여,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 국사편찬위원, 56년 진단학회 이 사장, 60년 교육부장관 역임 등. 역사 날조에 앞장섰던 사람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교육부장관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가 해방 후에도 바로잡힐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역사를 배운 후학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를 배웠겠는가? 또 강단 주류학파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지금도 사학계를 주도하고 있다. 과거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는 이 식민사관의 ‘왜독倭毒’에서 아직도 전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

역사를 모르면 인간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역사를 모르면 왜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를 알 수 없다. 인생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 위한 진리의 눈을 뜰 수가 없다. 인생사를 대국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여는 지름길이 바로 역사를 아는 데에 달려 있다.

역사란 다름 아닌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지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문명 진화의 총체이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 역사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모르면 현재를 진단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다., 지구촌의 정세를 훤히 꿰뚫어보는 국제정치의 대가라 해도, 인류의 원형 문화와 시원 역사를 모르고서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명, 인류의 미래 문명을 알 수도 준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 놓고서 성(姓)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지금 한국인은 제 나라 역사도 모르는 정신적 미아로 살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된다.

그 중에서도 한민족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를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뿌리 역사는 왜곡되어 잃어버리고 꼬리 역사만 배우고 있다. 우리의 뿌리 역사와 한(韓) 문화의 원형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일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 모두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했던 바로 그 다음해에 운초 계연수(桂延壽, 1864~ 1920) 선생이 그의 스승 해학 이기(李沂, 1848~1909)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스승의 명을 맡아가지고, 예로부터 민간에 비장되어 온,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 종의 책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환단고기桓檀古記』다.

신라 고승高僧 안함로安含老(579~640)에서 조선조 이맥李陌(1455~1528)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진 것이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편집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민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계연수 선생이 쓴, 환단고기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를 보면 그 글들이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라는 책을 부정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후대에 조작된 책이 아니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독보적 가치는 무엇보다도 국통맥國統脈을 바로 세워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나라는 지금의 대한민국으로부터 거꾸로 조선, 고려, 그 다음에 발해라고 하는 본래의 대진국, 남쪽에서는 통일신라가 있었고 그리고 고조선은 껍데기로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전에는 다 신화 역사로 없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우리 본래의 종교와 우리의 역사관으로 역사를 해석한 게 아니고, 일연 스님이 불교 역사관으로, 또 이성계의 조선에 와서는 그 아들 되는 태종 이방원이 유교의 가르침 국시와 역사관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관에 있었던 우리 전통 역사서를 다 불질러버렸다.

그리고 우리 역사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전부 능지처참을 한다고. 닉자처참匿者處斬. 숨긴 자는 목을 벤다는 것이다. 이게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록이다. 그래서 역사사서를 가지고 있을 수도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 역사관이라는 것은 불교사관, 유교사관, 이것이 이조 오백년을 내려오면서 결국은 우리 역사를 일본에게 다 내주고 노예민족으로 전락을 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근대 역사의 문을 연 동학 혁명 농민군들의 절규가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선생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찾아준 하나님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

삼신오제三神五帝가 우리 민족의 창세 역사, 우리 민족의 문화 역사를 보는 근본 틀인데, 이걸 중국 사람들이 가져다가 삼황오제三皇五帝라고 했다. 그런데 사마천 사기도 삼황三皇은 가져가지 못한 것이다. 이게 동방족 역사의 원 뿌리기 때문에 오제五帝만 갖다가 오제五帝 역사로서 자기들의 과거 역사를 정리 했다.

우리는 지금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삼황三皇의 역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환국과 배달 조선의 환인, 환웅, 단군의 40년 부족한 7천년 역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7세 환인의 3,301년, 18세 환웅의 1565년. 그 다음에 단군왕검의 역사가 나오는데, 바로 이것을 한 마리 곰과 호랭이가 사람 되기 운동을 했는데, 마늘과 쑥을 먹고 곰만이 사람이 됐다.

일웅일호一熊一虎.를 실제 한 마리의 곰과 호랭이라고 그걸 앵무새처럼 다 따라하는 것이다. 그걸 신화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 역사를 우리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환단고기桓檀古記 원본에서는 동린이거同隣而居, 같은 이웃에서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우리 역사 본래의 참모습을 가르쳐주는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우리의 본래의 역사다. 단군왕검의 역사라는 것은 단군檀君은 이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고 왕검王儉은 관경의 장이다. 국가 영역을 통치를 하는 정치군장이다.

14세 때, 웅씨왕雄氏王에 의해서 비왕裨王으로 천거되어 대읍국大邑國에서 24년 동안 왕권 수업을 받고서 고향에 와서 38세에 등극을 했다. 그러고서 나라를 三韓(진한, 마한, 번한)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

만주 전체는 진한이고, 한반도 전체는 마한이고, 요서지역, 지금 산동성 아래에 있는 오나라, 월나라가 머리터지게 싸웠던 강소성 절강성, 바로 그 절강성까지가 단군 조선의 간접적인 통치 영역이었다. 그건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가가 100년 전에 중국을 알려면 상해를 가라. 그러나 그대가 5백년 전의 중국을 볼려면 북경을 보라. 자금성, 1천 년 전의 중국을 볼려면 서안, 장안을 보라. 그러나 5천년 전의 중국을 보려면 탁록을 가보라. 탁록이 황하문명의 원조인데 여기를 가보면 황제성이 있다. 황제헌원이 4,700년전에 다스렸던 그 성터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그런데 그옆에 가보면 바로 치우천蚩尤泉이 있다. 배달국 14대 환웅桓熊, 치우천황(蚩尤天王,BC2706~ BC2598)과 함께 전쟁을 했던, 그 치우蚩尤가 동방의 대황제다. 천자다. 치우蚩尤는 옛동방의 古天子라고 중국 사서 주석에 있다. 전쟁을 했던 그 유적지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우리가 환국과 배달, 단군조선에서 보면 단군조선이라는 나라를 삼한으로 다스렸다. 고조선이 진한, 마한, 번한인데 바로 진한眞韓의 수도가 하얼빈, 마한馬韓은 한반도의 평양, 그 다음 번한番韓은 안덕형이라고 대지진 났던 당산이었는데, 그래서 이 삼한의 삼경 균형이 무너지는 날 고조선이 패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게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도 나오고, 조선왕조 때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이 내용이 있다.


고조선이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 이게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다. 삼한으로 나라의 국가 영토 경계를 나누어가지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 삼한이 무너지면서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서 바로 경주에 진한, 가야의 번한, 익산의 마한, 이것이 나중에 바로 백제, 가야, 신라가 되었는데 지금은 남삼한南三韓만 아는 것이다.


남삼한南三韓. 한강 이남의 이 작은 남삼한. 그런데 이 남삼한은 다 북삼한北三韓에서 내려왔다.

우리가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보면, 지금 황하 양자강 남부에서는 대략 한 8천년 전에 유물이 나오고 있다. 자산磁山문화가 8천년에서 7,500년. 앙소仰韶문화가 7천에서 한 5천년 전 신석기 유적이 나오고 있고, 하모도河姆渡 문화가 한 7천년 전. 중국은 이 마가빈馬家濱이 7천이고, 대계大溪문화가 거기도 7천년에서 5천년. 제일 오래된 자산문화가 한 8천년인데, 만리장성 북쪽은 본래는 중국 사람들도 그것은 동이족의 문화라고 했다. 동방문화. 자신들 문화하고는 문화 양식이 다르다. (출처: 30년의 각고끝에 상생출판사에서 발행한 환단고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