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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대첩
  장세윤박사   2005-05-30
봉오동 대첩.hwp   3161
1.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의 성립
1920년 초반 두만강의 얼음이 녹지 않았을 때 국내로 진입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둔 독립군 부대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하여 국경지방에서 적을 습격하며 주구배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활동은 소규모 습격전투 이후 곧 만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국내외의 여론을 환기할 만 한 대규모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간도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여러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거나 연합시켜 강대한 부대로 재편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홍범도는 이미 수차례 공동 작전을 전개하였던 최진동의 도독부와 연합하여 3월 25일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그는 3월 30일에 구춘선의 집을 방문하여 각 부대의 연합문제를 상의하였다. 이 무렵 홍범도는 간도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일과 연합을 위해 노력하였는 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러한 상황이 일제측 정보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노력의 결과 5월 3일에는 최진동의 본거지인 봉오동에서 북로군정서·국민회·군무도독부·신민단·광복단·의군단 등 6개 독립운동 단체의 주요 간부들이 모여 서로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대한독립군은 기실 1920년 초반에 맨 먼저 국민회 직속 독립군 부대와 연합했었다. 대한독립군은 국민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고 그 산하에서 활동했지만 국민회에는 안무(安武)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한국민회 국민군(약칭 국민회군)’이 편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맡고 안무는 국민회군을 지휘했지만 연합부대의 총지휘는 홍범도가 담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양군의 총지휘 때는‘정일 제1군사령장관(征日第一軍司令長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국민회 산하에서 대한독립군이 국방군의 성격을 띠고 있던 반면에 국민회군은 경찰적 기능을 맡았던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홍범도 등의 노력으로 마침내 5월 28일에는 홍범도 부대, 안무 부대, 최명록 부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게 되었다. 북로독군부는 병력을 화룡현 봉오동(鳳梧洞)에 집결시켰다. 당시 간부진은 이러했다.

대한북로독군부 부장(府長) 최진동
부관 안 무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部長) 홍범도
부관 주 건
참모 이병채
향관(餉官) 안위동(安危同)
군무국장 이 원(李園)
군무과장 구자익(具滋益) 치중(輜重)과장 이
상수(李尙洙)
회계과장 최종하(崔鍾夏) 향무(餉務)과장 최서
일(崔瑞日)
검사과장 박시원(朴施源) 피복과장
임병극(林炳極)
통신과장 박 영(朴英)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 조권식(曺權植)
사령부장 직속 병력 약간

간부구성을 보면 주로 행정과 군사 두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정의 책임자인 북로독군부의 대표와 부관은 도독부의 대표인 최진동과 국민회군의 안무가 맡고 군사 분야는 전적으로 홍범도가 맡은 체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대한북로독군부의 성립시 봉오동에 막대한 토지와 재산을 갖고 있던 최진동 3형제가 재산을 모두 독립군에 바쳐서 많은 군비를 조달한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창립 초기 대한북로독군부의 근거지는 자연스럽게 재정 지원과 보급을 받기 쉬운 봉오동 일대가 되었다. 북로독군부의 성립 직후 봉오동 골짜기에는 이제 800~900명 내외의 많은 독립군 병력이 집결하여 일제와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세 부대 외에 약 80명의 신민단 독립군도 합세하여 있었다.
2. 삼둔자(三屯子), 후안산(後安山) 전투
대한북로독군부가 성립하여 독립군이 대병력을 형성하고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소규모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입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한 작전의 한가지로서 1920년 6월 4일 북로제1군사령부의 협조하에 약 30명의 신민단 독립군 소부대가 함북 종성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여 교전한 뒤 돌아왔다. 이 보고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장 아라요시(新美二郞) 중위는 다음날 1개 소대와 10여명의 헌병을 인솔하고 불법으로 중국 영토인 화룡현 삼둔자로 침입해 왔다.
삼둔자는 김·박·최씨 성을 가진 한인 농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동족 마을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바로 이 삼둔자와 근처의 후안산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를 시발로 하여 전개된 것이었다.
두만강을 건넌 일본군은 삼둔자에서 독립군을 발견치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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