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관련자료 > 문헌자료
 
   대한독립군의 봉오동전투
  정기용   2005-05-24
봉오동전투.hwp   2781
  1.대한독립군의 봉오동전투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 압록강 대안 만주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던 수개의 독립운동무장부대는 쉴새없이 국내로 진입하여 국경지방의 일군경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활동은 날이 갈수록 치열의 도를 더하여 가고 있었으며 특히 홍범도가 인솔하는 독립군의 활동은 왜경들에게 크나큰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1920년 6월 국내진입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독립군이 압록강을 도강하여 삼둔자 방면으로 귀환하자, 분이 머리끝까지 오른 일군 남양수비대장 신미이랑(新美二郞) 중위는 일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6월 6일 추격하는 일군을 공격하여 일군 60여명을 사살하였으며 50여명에게 부상을 입혀 일군을 패주시켰다.
  한편 일군의 패전보고를 들은 일군 19사단장은 안천(安川) 소좌에게 보병 및 기병총대 일개대대를 급파하여 신미중위의 잔류병력과 합세하여 독립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6월 7일 고려령 서족 1,500M 지점에서 이화일이 인솔한 독립군의 기습을 받고 많은 병력과 무기를 잃고 다시 패퇴하였다.
  한편 삼둔자와 고려령에서 대승전을 거둔 독립군은 사령부 소재지인 왕청현 봉오동으로 집결하였는데 이 독립군의 병력이 7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 부대가 유명한 대한독립군으로써 그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  령  관  :  최진동 (崔振東)    부      관  :  안  무 (安  武)    제 1연대장  :  홍범도 (洪範圖)    연대부장교  :  이  원 (李  圓)    제 1중대장  :  이천오 (李千五)    제 2중대장  :  강상모 (姜尙模)    제 3중대장  :  강시범 (姜時範)    제 4중대장  :  조권식 (曺權植)    제 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  이화일(李化日)

  당시 부대가 진주하고 있는 봉오동은 반이상이 새로 지은 가옥으로 형성되어 있는 신흥부락으로써 다른 교포부락에 비하여 월등하게 질서가 잘 잡혀 있는 부락이었다.
  사방이 고지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군사요새로서의 천연전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삼둔자 및 고려령에서 패전을 당한 일군은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격멸하고자 1920년 6월 1개대대 병력으로 봉오동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독립군사령부에서는 일군의 내습을 탐지하고 부락민을 전원 대피시키고 일군의 공격에 사전대항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6월 7일 아침 독립군사령부는 제1연대를 독립군연병장에 집합시키고 각 부대의 전투구역을 배치하고 연대장 홍범도가 지휘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1중대장 이천오는 부하를 인솔하여 봉오동 상촌의 서북단에 잠복하고,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쪽 고지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쪽 고지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남단에 잠복하였으며 연대장 홍범도는 2개중대를 인솔하여 남산 가운데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연대부장교 이원은 본부 및 잔여중대를 인솔하여 서북산간에 위치하여 병력과 탄약을 보충하며 양식보급을 담당케 하였다.
  독립군사령부의 작전계획을 보면 일군의 봉오동으로의 진격은 독립군의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고려령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리였던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은 독립군의 사전 작전계획에 의거 행동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화일부대의 임무는 일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봉오동에서의 전투태세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시간여유를 얻고, 거짓으로 패하는 체하여 일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각본에 의하여 일군이 봉오동으로 유인된 것이었다.
  12시 안천부대는 보병을 앞세우고 종대열로 상봉오동으로 돌입하였다. 그러나 사방고지에 잠복한 독립군은 후속 일군부대가 포위진에 완전히 들어오기까지 사격을 않고 잠복하고 있었다. 홍범도는 사전에 휘하 장병에게 실탄이 곧 목숨인 줄 자각하여 적을 완전히 쓰러뜨릴 수 있는 거리에 오기 전에는 절대로 헛되이 난사하지 말 것을 주의하였던 것이다.
  돌입한 일군이 학교에 들어가 수색을 마치고 교정에 나왔을 때 홍범도는 사격신호로써 일발을 발사하였다. 일군이 전혀 독립군의 계략을 알지 못하고 사방에 복병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 허를 찔러 맹공을 가하였다. 동서북방 3면에서 쏟아지는 총탄에 일군은 혼을 빼앗겨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오후 1시경 정신을 차린 안천(安川)은 신곡(神谷)중대와 중서(中西)중대를 지휘하여 동쪽 고지의 강상모중대를 반격하였으나 강상모 중대장은 일군을 맹공하여 이를 격퇴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도주하는 일군을 추격하여 1백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중대원을 정비하여 산 뒤에 잠복하였다.
  오후 3시 30분 안천은 다시 예비중대인 삼(森)중대와 앞서 패전한 신곡중대와 중서중대의 잔류병력과 합동하여 기관총대를 선두로 강상모중대를 공격하였다.
  강중(姜中)대장은 양면에서 공격하여 오는 일군을 맞이하여 치열한 교전을 전개한 끝에 교묘히 일군이 눈치 채지 않게 살짝 후퇴하여 버렸다.
  독립군이 있는 줄 알고 총을 난사하며 양면에서 올라온 일군은 서로 상대방이 독립군인 줄 알고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이니 일군 중에 총탄을 맞고 죽어 가는 자가 늘어났다.
  더욱이 인접한 503고지와 부근 고지에 있던 독립군이 맹렬한 사격을 가하니 일군의 사상자는 더욱 배가하였다.
  교전 4시간동안 치열한 전투를 겪은 독립군은 잠시 일군이 패주한 사이에 북방과 서방으로 양분되어 썰물같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 때 홍범도는 교정에 나와 일군이 남긴 무기와 탄환을 걷은 후 주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철수하였다.
  우둔한 일군은 오후 5시경 다시 대오를 수습하여 공산동(空山洞)으로 철수하였으며 이날밤 야영을 마친 후 일군 19사단장의 명령으로 철수하였다.
  이 통쾌한 승전에서 독립군은 적 사살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의 전과를 올렸으며 독립군측 피해는 전사 장교 1명, 사병 3명, 중상 1명에 불과하였다.
  세계막강을 자부하던 일군은 보잘 것 없는 소위 불령선인의 무리에게 치욕적인 패전을 당하자 간악하고 야비하게 자기들의 오욕을 감추기 위하여 일군사령부는 전사 1명, 부상 1명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며 독립군에게 사살 30명 , 포로 6명의 피해를 주었다고 터무니 없는 전과를 발표하였다.
  예상 이외의 대승전을 거둔 대한독립군은 본영(本營)인 명월구로 향하였다.
  이들은 본영에 도착하기전 노령구(老嶺溝)에서 재차 일경수색대와 조우하였다. 간도 총영사관경찰서의 고등계 형사부장 평정삼대치(坪井三代治)가 지휘하는 수색대를 발견한 독립군은 때마침 점심식사 중이었으나 곧 공격을 취하여 일경수색대를 격퇴하였다.
  공전의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 독립군은 영생동 중간촌(永生洞 中間村)에서 그 곳 국민회와 교포들로부터 극진한 전승축하를 받았다.
  봉오동전투를 지휘하여 승전으로 이끈 홍범도는 이날 내빈으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53세의 노인으로서 중키에 뚱뚱한 몸집을 한 그는 계급장도 없이 일개 졸병의 차림으로 지휘도나 권총대신 장총을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들 독립군은 수개월 후인 10월 다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부대와 연합하여 독립군 역사상 가장 찬란한 전과를 남긴 청산리전투을 격었던 것이다.